과거사는 과거사(史)가 아닌 과거사(事)로, 과거의 국가폭력을 지나간 역사로만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무고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해원이 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흔히 ‘국가폭력’은 대한민국 국가 권력, 혹은 특정 시기 일제와 같은 외부 지배 권력이 대한민국 영토 내의 자국민과 외국인에게 가한 폭력을 일컫는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고문당했던 날, 집단학살로 가족을 잃은 날, 강제로 수용시설에 끌려갔던 날 등 국가폭력의 기억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수면 아래 잠들어있다. 그러나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겐 생생한 아픔이다.
지난 2020년 5월 20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12월부터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했다. 1기 진실화해위에 이어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과거 청산의 중요한 길목 앞에 서있다. 진실화해위 활동이 재개된 지금, 과거청산에서 우리 앞에는 어떠한 과제가 남아있는지 살펴보았다.
진실을 찾기 위한 발걸음
2005년 과거사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과거사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해 1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했다.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권위주의 통치 시기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사건 등이 주요 조사대상이었다. 1기 진실화해위는 2005년 12월부터 2010년 6월 30일까지 활동하며 11,175건의 사건 중 8,450건에 대한 진실을 규명했고, 국가의 사과와 위령사업, 재심 및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을 권고했다. 실제로 1기 진실화해위가 재심을 권고하거나 재심사유를 확인한 사건 중 많은 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고 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4.9 통일평화재단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경우 1기 진실화해위에서 다룬 피해자 중 6,591명이 국가배상소송을 진행했으며 이 중 5,665명이 승소했다. 권위주의 통치 시기 인권침해 사건 중 79개 사건에 대해 재심사유가 확인됐고, 이 중 대부분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기 진실화해위는 많은 성과를 이뤘지만, 한계점도 분명했다. 1기 진실화해위는 전국을 대상으로 긴 시기를 포괄적으로 조사하는 최초의 진실규명기구였기에, 출범 이후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미 활동 기간의 절반 이상이 지난 3~4년 뒤에야 진실화해위는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구성원이 각자의 업무에 익숙해졌을 무렵 1기 진실화해위는 활동을 마무리해야 했다. 한시적인 기구의 한계였다.
1기 진실화해위는 출범 당시 독립기관을 표명했으나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예산과 인사권 등에 있어 행정안전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정권 교체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했다. 1기 진실화해위 활동 기간 도중 정권 교체가 일어나면서 진실화해위 구성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1기 진실화해위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했던 성공회대 김상숙 연구교수는 “2009년 말에서 2010년 무렵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한 위원들의 임기가 끝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진실화해위) 구성이 변경됐다”고 말했다. 보수 정권 인사들로 구성이 변경되며 남은 활동 기간 동안 진실화해위의 과거 청산 기조도 바뀌었다. 김 교수는 “진실규명 시 내용을 축소하기도 하고, 진실화해위 말미에 다뤘던 미국폭격사건 등은 진실규명 불능이나 각하결정을 했다”고 당시 느꼈던 아쉬움을 말했다. 실제로 1기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불능 사건 528건 중 72.5%가 2010년 상반기에 결정됐다.

1기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 신청이 된 사건 위주로 조사를 진행했다. 신청이 없더라도 진실화해위 직권으로 진실규명을 결정할 수 있으나, 진실화해위가 직권조사를 결정한 사건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을 비롯해 15건에 그쳤다. 진실화해위는 과거사법 시행일인 2005년 12월 1일로부터 1년 동안 신청을 받았지만 신청 기간을 알지 못했거나 국가에 대한 불신이 남아있어 신청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또한 5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모든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진실규명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건을 뒤로한 채 1기 진실화해위는 문을 닫아야 했다.
법원에서의 지난한 시간들
과거사법엔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이후 후속조치에 대한 명확한 조항이 없다. 진실화해위는 활동을 마무리하며 피해자 구제를 위해 배·보상 특별법 제정 등을 권고했다. 입법을 통해 일률적인 배·보상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이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피해자는 배·보상을 받기 위해 개인 단위로 국가에 소송을 청구해야 했다. 재심청구를 위한 증거가 소실되거나 폐기될 경우 피해사실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교양학과)는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서 자료를 찾아 개인적으로 소송을 준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입증책임이 개인에게 돌아가는 현 상황을 지적했다.
어렵게 법원을 찾은 피해자에게 피고 국가는 ‘국가배상청구권(청구권)을 행사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답을 내놨다.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한 것이다. 소멸시효 제도는 권리자가 권리 행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안에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때 권리가 소멸되는 제도로, 국가에 금전을 요구할 시 소멸시효기간은 불법행위일 혹은 불법행위 종료일로부터 5년이 원칙이다. 이에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의 경우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고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며 피해자들의 청구를 인용했다. 이때만 해도 청구권의 행사 기간에 대한 제한은 판결문에 언급되지 않았으나, 진상규명결정일로부터 3년을 통상적인 소멸시효 기준으로 여겼다. 이 판단은 대법원에서 2013년 선고된 진도 민간인 학살사건(전원합의체 판결) 전까지 유지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처음으로 원고가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을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 판결을 기점으로 원고에 해당하는 피해자들에게 ‘상당한 기간’, 즉 단기간 내에 청구권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며 매우 부득이한 경우에도 진상규명결정일로부터 3년을 넘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부터 약 반년 뒤, ‘상당한 기간’을 명시한 판결(대법원 2013다201844)이 선고됐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재심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특별한 사정이란 형사보상청구를 한 경우에 해당하는데, 이마저도 재심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이뤄져야 했다. 이후 이 판결에 따라 상당수의 청구 소송이 기각됐다.

소멸시효 기간이 갑자기 대폭 축소되면서 피해자들은 타격을 입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위원회 양성우 변호사는 “자의적이고 모호한 사유로 인해 원고들은 국가에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소멸시효 기간을 당시 통상적으로 여겨졌던 3년으로 생각하고 소송을 준비하던 피해자들은 무죄판결 이후 6개월이 지나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게 됐다. 하급심에서 인용된 손해배상청구가 소멸시효 기간 축소로 상급심에선 기각되기도 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김복영 회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법안”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피해자들은 이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했고, 2018년 헌법재판소는 과거사 사건의 경우 일반적인 소멸시효 규정을 주장할 수 없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하급심에서는 여전히 6개월의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연체된 위자료에 대한 이자인 지연손해금 역시 화두가 됐다. 지연손해금의 기산점, 즉 적용 시점을 언제로 설정하는지에 따라 배상 금액은 크게 달라진다. 하급심에선 기존 판례에 따라 지연손해금의 기산점을 불법행위 발생 시점으로 봤으나, 이를 뒤집는 대법원 판결이 등장했다. 바로 ‘아람회 사건’ 판결이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 시절 동창생 등으로 서로 가까웠던 일반인들이 모임을 가졌다는 이유로 반국가단체구성 및 찬양고무 등의 죄를 지었다며 처벌한 사건이다. ‘아람회’는 피해자 김난수 씨의 딸 김아람의 백일잔치를 반국가단체 모임으로 보고 붙인 가상의 단체명으로, 허위자백을 받는 과정에서 불법구금과 고문 등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대법원은 지연손해금에 대한 기존 판례를 뒤집고 지연손해금 기산점을 변론종결일로 봤다. 서울고등법원이 산정한 위자료는 206억 원이었으나, 이 판결로 대법원에선 배상금이 90억여 원으로 줄어들었다.
대법원이 지연손해금 기산점을 변론종결일로 본 이유는 불법행위 시부터 통화가치나 국민소득수준 등에 상당한 변동이 발생할 수 있고, 이때 기산점을 불법행위 시로 잡는다면 ‘현저한 과잉배상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대법원 2009다103950) 기산점의 변동으로 오히려 빚이 생기는 피해자도 발생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피해자의 경우 청구가 인용되며 2009년 산정된 배상금의 2/3 정도를 가지급받았다. 그런데 2011년 대법원은 가지급된 배상금이 과다 책정됐다며 지연손해금 산정액을 대폭 축소했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배상금을 다시 반납해야 했지만, 빚을 갚거나 기부하는 등 이미 배상금을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 배상금을 갚지 못하는 동안 연 20%의 지연이자는 쌓여갔다. 피해자 이창복 씨는 판결 당시 4억 9,600만 원을 반납해야 했지만, 지연이자로 인해 13억원 정도의 빚이 생겼다. 양성우 변호사는 “장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데 따른 불이익을 원고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법원이 강조하는 ‘공평의 관념’에 명백히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법 외에 과거사 관련 보상법이 제정되지 않았다. 경희대학교 최광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보상법이 제정되기 어려운 이유는 인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거 발생한 반인도적 행위를 직시하고, 과거 청산을 위한 전체적인 ‘로드맵’을 세우는 인권 의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독일의 사례를 들며, “독일에서는 (국가가) 책임감을 충분히 느끼고 피해자 구제 노력을 했기에 피해자들이 법원으로 내몰리는 경우를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다”며 피해자가 법정까지 가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해자를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 체계가 부재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개별 법원의 판결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한홍구 교수는 “(포괄적) 기준이 없다 보니 똑같은 사건의 피해자여도개별 재판부에 의해 고통을 비교 받게 된다”며 포괄적인 법안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끝나지 않은 과제들
지난 2020년 12월, 1기 진실화해위가 활동을 마무리한 지 10년 만에 2기 진실화해위 활동이 시작됐다. 2기 진실화해위는 1기 진실화해위에서 여러 한계로 다루지 못했거나 미흡하게 다뤘던 사건들을 다룬다. 우선적인 과제로 강제수용시설 인권침해 피해자에 대한 진실규명을 꼽는다.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산개척단 등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중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사상구의 형제복지원에서 부랑자를 단속한다는 명목으로 무연고 장애인이나 고아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불법으로 납치한 사건이다. 13년 동안 복지원 내에선 강제구금 및 강제노역, 구타, 성폭행, 살인 등의 폭력이 자행됐다. 1987년 형제복지원 운영자였던 박인근 원장이 구속됐지만 큰 관심을 받지 못했고, 2012년 즈음부터 피해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5월엔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인 최승우 씨가 고공 단식농성을 벌여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과거 청산은 피해자 구제, 그중에서도 배·보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전문가들은 과거 청산이 더 다양한 층위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상숙 교수는 지금은 과거 청산에 대해 “형식적인 시늉”만 하고 있다며 “피해자 구제는 돈 몇 푼을 주고 화해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거 청산에서 금전적 보상은 최소한의 화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과거 청산의 단계를 네 단계로 설명한다. “진실규명, 피해자 배·보상과 명예 회복, 가해자 처벌과 재발 방지 제도화, 화해와 역사화”가 바로 그 네 단계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과거 청산을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고 표현하며, 네 단계를 시행하기 위해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행기 정의란 과거 권위주의·전체주의 체제, 혹은 내전이나 분쟁이 종식되고 새로운 체제로 넘어갈 때 바로 세워야 할 정의를 말한다.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재정립하기까지 체계적인 단계가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가해자를 밝히고 처벌하는 과정은 피해자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밟아야 할 단계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재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절차가 대부분 생략됐다. 양성우 변호사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가해자는 당시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관들인데, 실제 가해자의 불법행위를 입증할 수 있는 관련 기록(증거)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위법성 입증이 곤란”한 점을 꼽는다. 형사재판의 경우 공소시효가 만료돼 가해자를 처벌하기 어렵고, 민사재판에선 가해자의 책임을 묻기 위해 국가가 가해자에게 직접 구상권을 청구했던 적이 있지만 이는 매우 드문 사례다. 그러나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것은 사법적 정의 바깥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 한홍구 교수는 “(한국은) 가해자 문제를 완벽하게 빗겨간 과거 청산”이라며 “현실의 법정에는 세우지 못해도 역사의 법정에는 세워야 비로소 피해자들이 피해복원과 치유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폭력을 공론화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과정은 공동체 구성원의 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화해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한홍구 교수는 “지금의 ‘화해’는 (보통)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를 의미하지만, 그 이전에 공동체와 피해자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방관하고 외면한 것에 대한 공동체의 인지와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과거엔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말을 섞으면 간첩이 되기 때문에 피해자를 과거 공동체에서 배제시켰다”며 공동체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체 구성원의 책임과 합의가 있어야 국가폭력에 대한 사회적인 담론을 재정립할 수 있다. 국가폭력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일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서 과거의 국가폭력을 기억하고 피해자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할 때 이행기 정의가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죽음을 죽인 사회’라는 말이 있다. 어떤 죽음은 때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한국전쟁의 민간인 희생자는 약 100만 명에 이르지만, 여전히 대부분이 이름도 시신도 확인되지 못한 채 잠들어있다. 밝혀지지 않은 죽음이 잠든 채 오늘도 시간은 흐른다. 과거의 잘못과 진정으로 마주하고 화해한 후에야, 과거사는 과거사(史)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