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히 지켜낸 ‘시선’의 조각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2020)

  “순전 여자들만 고생할 뿐인, 사라져야 할 관습”인 제사를 지내지 말라던 심시선의 10주기. 심시선이 생전 머물던 하와이로 떠난 그의 가족들은 ‘심시선의 가족다운’ 제사를 지낸다. 하와이에 지내는 동안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수집해 제사상에 올리기로 한 그들은 각자 섬을 돌아다니며 시선의 조각들을 하나둘씩 꺼내본다.


  모계가정. 김치를 사먹는 게 자랑인 집안의 뿌리는 심시선 여사다. 시선은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유쾌하게 외치는 ‘할머니’다. 시선의 기개는 어디서 왔을까. 가족이 국군에게 몰살당한 뒤 홀로 떠난 하와이에서일지, 공부를 시켜주겠단 마티아스의 말에 따라가 학대를 겪은 유럽에서일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의 총체적 결과일지는 알 수 없다. 삶의 여러 굴곡 속에서도 시선은 살아남았고, 시선의 단단함은 그의 핏줄들이 삶을 대할 때마다 시선을 떠올리게 한다.


  시선은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한다”고 부추기지만 하나뿐인 아들에겐 몸을 낮춰서 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인지 그의 가계에 존재하는 남자들은 모두 이야기의 주변부에 위치한다. 여성들이 중심부를 완고하게 차지한 서사는 낯선 만큼 흥미롭다. 시선을 닮아 기세 좋은 집안 여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사회를 마주한다. 결혼 직전 당한 파혼을 핑계로 편안하게 ‘혼자-됨’을 택한 명은. 딸이 아프고 난 뒤 남편과 달리 직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난정. 빼어나지 않은 여성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려 은퇴를 미루고 회사에 남은 경아. 남자가 여자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상에서 걸음을 멈춰선 화수. 가스라이팅, 그루밍이란 단어조차 알 수 없었던 심시선. 여성으로 겪는 다양한 고민들이 펼쳐지고, 해결된 문제와 지속되는 문제가 여전히 공존한다.


  『시선으로부터,』는 결국 치유를 이야기한다. 화수는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회사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난정은 딸 우윤이 시선을 닮아 꺾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위안을 얻는다. 그들의 뿌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심시선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심시선이 ‘가지지 못한 과거, 가지고 말 미래였으면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 하와이, 다시 뒤셀도르프에서 한국으로 떠다닌 시선은 독특한 개인이 아닌 흘러간 역사의 일부다. 그래서 『시선으로부터,』는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시선이 자신을 파편화한 글에 남겼듯이, 정세랑 작가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시선으로부터,』에 조각내 담았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역사가 재개발에 덮이는 광경,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 한국과 하와이를 잇는 제국주의의 닮은 얼굴들까지. 정세랑의 ‘시선’을 통해 다정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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