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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세상 위에서, 무뎌지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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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세상 위에서, 무뎌지지 않기 위해

  ‘알파벳 교수’, 참 어울리지 않는 두단어의 합(合) 입니다. 하지만 이 이상한 말은 작금의 대학을 설명함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대학에서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해 학생을 대상으로 권력형 성폭력과 인권침해 가해를 저지른, 하지만 A, H, K라는 알파벳 뒤에 숨어있는 가해교수를 이르는 말입니다.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해결을 위한 2020 총선/국회 대학가 공동대응(이하 ‘공동대응’)’의 첫 회의는 각자 자기 대학의 ‘알파벳 교수’를 소개하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의 H교수와 A교수, 인천대 A교수, 국민대 J교수, 이화여대 K교 수와 A교수, 성신여대 A교수, 동덕여대 H교수… 그리고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이 교수들에 맞서 싸워왔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긴 여정이었 고, 지난한 싸움들이었지만 막상 말로 정리하니 몇 마디 되지 않는 것이, 그 시기가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무엇이든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두렵고, 슬프고, 원망스럽던 일도 반복되다보면 그냥 언제나 있는 일,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권력형 성폭력’이라는 여섯 글자가 그랬습니다. 이미 우리의 대학에서는 ‘정상’이고 ‘일상’이 되어버린 이 여섯 글자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관성적으로, 한편 업무적으로 ‘공동대응’을 준비했습니다. 당위와 필요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에는 무뎌진 상태로 이것저것 일을 처리하다가, 한 기자님의 인터뷰 질문을 받고 아주 오랜만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기획단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학생으로서, 이런 사건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냐”는 질문이었고, 1학년이 막 끝나갈 때쯤의 장면들이 생각났습니다. 사회학과 H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학생모임이 꾸려지고, 인권센터가 정직 3개월의 권고를 내렸다는 사실이 폭로될 즈음이었습니다. 

‘학교는 나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구나, 학교는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전하지 않은 학교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오직 손을 잡은 서로 뿐이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이 운동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습니다. 가장 예민하고 날선 마음으로, 두렵기도 불안하기도 했지만 옆에 손을 잡을 친구가 있었기에 따뜻했던 천막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때의 생생한 감각들이 발끝부터 몸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사회학과 H교수 파면투쟁 천막에서 자던 날, 그런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납니다. “천막은 참 이상해. 사실 그냥 길바닥인데, 왜 안전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까” 그건 아마도, 아무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서로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2020년, 우리는 다시 모였습니다

  지난 투쟁을 거쳐 오면서, 우리는 ‘안전하지 않은 대학’을 만든 것은 한두 명의 가해교수뿐만이 아니라, 대학 구조 그 자체임을 확인했습니다. 학생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교수의 권력형 성폭력, 그가 성폭력과 인권 침해를 저지르고도 남아있을 수 있는 대학 그 자체가 문제이고 가해자였습니다. 교수들로 이루어진 교원징계위원회, 피해자의 권리보다 가해교수를 비호하기에 바빴던 대학본부, 인권침해 사건을 해결하고 피해호소인을 지원하기는커녕 2차 가해를 저지른 인권센터가 모두 가해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과 인권침해를 근절하기 위해 교원징계위원회의 구성을 민주적으로 재편하고 피해자의 권리 보장에 관한 규정을 추가하며, 독립성과 전문성, 성인지적 감수성을 가진 인권센터를 모든 대학에 필수적으로 설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를 위해 대학 교원징계 관련 규정을 담은 ‘사립학교법’과 ‘교육공무원법’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20 대 국회에서 발의되었던 관련 법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계류되고 있습니다. 교문 앞에서 멈추는 우리의 인권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손을 잡았습니다. 어떤 교수들은 학교를 떠나고, 어떤 교수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이 시기에, 우리는 이 날카로운 대학에 베여 피투성이가 된 서로의 손을 잡고자 다시 모였습니다. 잡은 손으로 대학을, 사회를 바꾸어보고자 다시 모였습니다.

  이렇게 14개 학생회와 18개 학생단체(2020년 4월 1일 현재)가 모여, 이제는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회가 나서서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해결을 위한 2020 총선/국회 대학가 공동대응’ 을 꾸렸습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동안 지연되고 유보되어온 우리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의 대학을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제는 국회의 응답을 돌려받으려 모였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절대 국회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호소하지도,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각자의 캠퍼스에서 만들고 키워 온 우리의 힘으로 국회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대학가 공동대응’은 지난 3월 12일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과 함께, 국회 앞에서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해결, 성평등한 대학을 위한 대학가 공동입법요구안’을 발표하고,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정당과 후보자들에게 관련 내용을 질의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대학가 공동행동과 서명운동, 국회 입법토론회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비록 대학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불투명한 상황 입니다마는, 찬찬히 하지만 강력하게 우리의 목소리를 변화로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알파벳 뒤에 숨어있는 가해자들을 보호하는 대학은, 우리 사회는, 어쩌면 우리가 무뎌지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그 악마가 잘못한 거고,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라는 말로, 때로는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빨리 높이 올라가’라는 말로, 또 때로는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냐’는 너무나도 솔직한, 그래서 잔인한 말로 우리를 사포질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 대학에서 다시 서로의 손을 잡는다는 것의 의미 는, 무뎌지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외칠 때마다 눈물이 나는 구호입니다. 무뎠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를 또다시 무디게 만들려 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되려고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당신과 함께.

홍류서연(사회17)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해결을 위한 2020 총선/국회 대학가 공동대응 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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