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은 하나의 문화다. 선조들은 술의 위험성을 경계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술을 빚고 즐기며 술 문화를 형성했다. 근대화의 풍파 속에서 잊혔던 한국의 전통주는 대중의 관심과 정부의 육성으로 최근에서야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고 있다. 소주와 맥주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게 전통주를 소개하는 공간이 있다. 언뜻 전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강남 한가운데다.
그 많던 우리 술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통주는 예로부터 전승된 방식을 활용해 만든 술 혹은 지역 특산물을 이용해 만든 지역특산주를 가리킨다. 한국 전통주는 주로 20세기 이전 각 집안에서 가내수공업으로 생산하던 가양주에서 기원하는데 20세기 이후 변화가 생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세수 확보를 위해 주류 생산을 통제했다. 1909년의 ‘주세법’과 1916년의 ‘주세령’이 제정되며 주류 생산에 면허가 필요해졌고 술 생산에 무거운 주류세가 부과됐다. 일제는 주류의 업체별 최저생산량을 지정하는 등 주류 생산의 산업화를 통해 세수 확보에 나섰고, 자연스럽게 소규모로 생산되던 전통 가양주의 종류는 줄어들기 시작한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전통주는 식량 사정 악화라는 악재를 맞는다. 그에 따라 쌀을 주원료로 하던 전통주 생산 역시 빠르게 감소했다. 정부는 1966년 식량 부족을 이유로 쌀을 이용한 술 생산을 전면 금지했다. 전통주에 대한 규제는 계속 이어지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고, 밀주(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제조하는 술)의 형태로 살아남아 생산되던 전통 가양주들이 그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전통주갤러리에 가다
서울 강남역에서 도보 약 10분 거리에 있는 전통주갤러리(갤러리)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전통주의 홍보를 위해 설립한 공간이다. 크지 않은 규모지만 지역 향토기업이나 무형문화재 장인이 생산하는 수십 가지 종류의 전통주를 전시 및 판매하고 있다. 갤러리에서는 달마다 특정 도의 전통주 5종을 선정해 매일 시음회를 진행한다. 2020년 2월의 시음주는 전북 지역의 술이었다. 5명의 기자가 직접 시음회에 참석해 다섯 종의 술을 즐겨봤다.

새콤한 오미자의 풍미, ‘황진이’
쌀을 양조해 만든 약주인 황진이는 붉은색을 띠며 투명하다. 제조 과정에서 산수유, 구기자, 오미자를 첨가해 산미가 뛰어나며 향이 좋다. 알코올 향이 강하지 않고 식감과 향은 옅게 탄 오미자차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기름진 음식과 함께 먹으면 잘 어울려 입을 깨끗하게 하는 술이다.
황진이는 양조주, 그중에서도 약주다. 술은 크게 과일이나 곡류를 발효시켜 만드는 양조주, 그리고 양조주를 증류해 도수를 높인 증류주로 나뉜다. ‘황진이’와 같은 약주는 양조주 중에서 쌀을 발효시켜 만든 것을 말한다. 쌀을 발효해 알코올을 만들려면 효모균, 즉 곰팡이가 필요하다. 전통주에서는 이를 위해 ‘누룩’을 이용한다. 통밀가루 반죽인 누룩에 곰팡이를 피우고 이를 갈아서 쌀에 섞으면 발효가 일어나 술이 만들어진다. 이 술을 체에 걸러 가만히 두면 말간 술이 고이는데, 이 술을 청주 혹은 약주라고 부른다. 청주와 약주의 구분은 모호하지만, 약주가 누룩의 비율이 더 높다.

누룩 향과 요거트 향의 조화, ‘우리술 오늘’
누룩과 쌀을 발효시켜 맑게 걸러내면 청주와 약주가 되지만, 그대로 여과해 누룩과 쌀 찌꺼기만 걸러내면 걸쭉한 탁주가 된다. ‘우리술 오늘’은 이렇게 만들어진 탁주다. ‘우리술 오늘’의 식감은 요거트와 비슷하다. 약간의 단맛과 함께 강한 신맛을 가지고 있어 시큼한 유제품을 먹는 느낌을 주며, 이 가운데 구수한 누룩 향기가 옅게 느껴진다. 갤러리의 조태경 부관장은 “흔히 누룩 향이라고 하면 쿰쿰한 메주 냄새를 생각하지만, 좋은 재료로 잘 띄워서 만든 누룩은 마치 빵 굽는 것 같은 냄새가 난다”며 “‘우리술 오늘’은 좋은 누룩의 향이 술의 산미와 단맛과 잘 어울리는 술”이라고 소개했다.
술에 있어 누룩이란 장에서의 메주와 같다. 조태경 부관장은 “누룩을 어떤 환경에서 띄우는지에 따라 다른 곰팡이가 피고, 술맛도 달라진다”며, “집마다 메주를 띄워 장을 담그면 저마다 맛이 다르듯, 각 집안에서 누룩을 띄워 술을 담갔던 전통 가양주도 제각각 맛이 달랐다”는 점을 한국 양조주의 특징으로 꼽았다.

청량한 달보드레함, ‘부안참뽕 막걸리’
흔히 막걸리를 곧 탁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막걸리는 탁주나 청주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술지게미)에 물을 부어 걸러낸 술이다. 때문에 도수도 물을 섞지 않는 탁주보다 낮다. ‘부안참뽕 막걸리’는 오디가 유명한 부안에서 만들어진 막걸리로 희뿌연 자색 색감이 특징이다. 마셨을 때 과일향은 강하지 않고 당도가 높다. 천연탄산을 함유해 톡 쏘는 맛도 세지 않다.
‘한국 술’ 하면 소주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술이 막걸리지만, 놀랍게도 막걸리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태경 부관장은 “막걸리는 근대 이후 등장한 술로 추정되는데 음식이나 술과 관련된 조선 시대 문헌을 찾아봐도 ‘막걸리’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며 “막걸리의 역사는 약 100년 정도로 추정되지만 민중, 특히 농민과 함께해왔다는 점에서 나름의 전통을 갖게 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도수만큼 강한 대나무의 여운, ‘죽력고’
‘죽력고’는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대나무를 사용한 술이다. 대나무 진액으로 만드는 ‘죽력고’는 대나무의 풀향기가 강해 마셨을 때 한약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도수가 높은 독한 술이며, 술을 넘긴 후에도 맵싸한 식감과 향긋한 대나무 냄새가 혀에 짙게 남는다. 앞서 살펴본 술들과 달리 ‘죽력고’는 증류주다. 증류주는 양조주를 끓여 알코올을 농축해 만든다. 익숙한 술 중에선 위스키, 브랜디, 고량주 등이 증류주에 속한다. 농축했기 때문에 도수도 더 높고증류 과정에서 자칫하면 메탄올이 발생할 수 있어 만들기도 어렵다. 죽력고는 막걸리를 증류해서 만드는데 증류 과정에서 대나무 진액을 증류기 안에 발라두기 때문에 진액이 술에 자연스럽게 섞여든다.
한국에서 원래 마시던 소주도 사실 ‘죽력고’와 같은 증류주다. 전통 소주는 쌀로 만든 탁주를 증류해서 만드는 독한 술이었는데, 60년대 이후 곡주 생산이 금지되면서 오늘날의 ‘초록병 소주’로 대체됐다. 오늘날 마시는 ‘초록병 소주’는 타피오카와 감자를 발효·증류시켜 얻은 고순도의 알코올을 물에 희석해 만든 것으로, 전통 소주와는 제조방법이 달라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술이다.

감미롭고 진득한, ‘선운산 복분자주’
시음 행사에 등장한 술 중 유일한 과일주다. 쌀을 이용하지 않고 100% 복분자즙을 발효시켜 만든 술로 얼핏 보면 와인과 비슷해 구분되지 않는다. 맛과 향 역시 산미가 있는 와인과 굉장히 비슷하지만 도수는 16%에 달해 소주와 비슷한 수준이다. 마시고 난 후에 혀에 감도는 복분자 향기가 진한 여운을 준다. 달콤한 치즈케이크와 잘 어울릴 것 같은 맛이다.
우물가에서 봄을 맞다, ‘풍정사계 춘’
조태경 부관장은 ‘다가오는 계절에 추천할 만한 술이 있냐’는 질문에 ‘풍정사계 춘’을 권했다. 한국엔 절기에 맞는 재료를 이용해 계절마다 다르게 빚어 마시는 풍속이 있었다. 충북 청주의 술 ‘풍정사계’ 4종은 각 계절의 특성을 한껏 살려서 만든 술이다. ‘풍정사계 춘’은 그중에서 봄을 위한 약주다. 감미료를 넣지않고 쌀 자체에서 나오는 단맛을 한껏 살렸으며 단맛, 쓴맛, 신맛이 어우러져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누룩을 만드는 과정에서 녹두가 들어가는데, 녹두에는 주독을 해독해주는 성분도 들어있다고 한다. 이번 시음회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정상회담 등에서 한국을 대표해 상에 오를 정도로 좋은 술이다.
우리 술, 젊은 감각과 어울리다
전통주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도 소비자와 향유층의 호응이 없으면 전통주는 살아남기 어렵다. 조태경 부관장은 최근 우리 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현상을 두고 “전통주에 대한 관심은 더 좋은 술을 찾기 위해 수제 맥주나 와인에 관심을 갖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며, “시간과 경제력은 부족해도 좋아하고 가치 있는 것에 소비를 아끼지 않는젊은 세대의 문화가 이런 영향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번 3월 갤러리는 전라남도의 술 5종으로 시음회를 이어간다. ▲장성의 ‘편백숲 산소막걸리 순수령’ ▲해남의 ‘해창 생 막걸리’로 막걸리가 2종이고 ▲해남의 ‘진양주’로 약주가 1종이며 ▲강진의 ‘병영소주’ ▲진도의 ‘진도홍주’로 증류주가 2종이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유가 무엇이든 술은 사람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왔다. 마시고 취하는 소주나 편의점에서 가볍게 사다 마시는 맥주도 좋은 술이다. 하지만 때로는 분위기 있게, 색다르게, 또는 더 맛있게 즐길 술을 우리 안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된, 하지만 낯선 우리의 술을 만날 기회는 생각보다 가까이 열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