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사는 인생, 청춘처럼 꿈꾸는 평생

MBC 김민식 프로듀서, PD의 삶과 노조 부위원장으로서의 파업을 얘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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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PD 인터뷰 사진 

ⓒ박나연 사진 기자

 2012년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던 MBC 노동조합(노조) 집행부원들은 5월 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소받은 당시 혐의였던 업무방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4월 29일 해고무효 판결이 있었고, 이후 5월 14일 대법원의 정직무효 판결이 있었다. 올해 있었던 일련의 판결들은 2012년 MBC 파업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노조 부위원장이었고 현재는 드라마 <여왕의 꽃> 공동연출을 맡고 있는 김민식 프로듀서(PD)를 만나 PD로서의 그의 삶과 그가 겪은 파업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꿈은 PD가 아니라 오로지 재밌는 인생

 김민식 PD는 스타PD라기 보다는 반짝이는 사람이다. 한양대 자원공학과 졸업, 한국 3M 입사,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졸업, MBC PD공채 합격이라는 이력 보다는 입학과 졸업 또는 졸업과 입사 사이의 이야기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다. 예능PD로서 첫 작품인 청춘시트콤 <뉴논스톱>을 성공적으로 만든 것도, 2012년 MBC 파업에 노조 부위원장으로 참여하여 을 제작한 것도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였다고 그는 말한다. 파업 전에 드라마국으로 이전해 이미 메인 연출이 되어 4편의 드라마를 거쳤다. 그런데 파업 후에 3년간 일이 없었다. 드라마 <여왕의 꽃> 야외연출이 파업 후 그에게 돌아온 첫 일이었다. 야외연출은 스튜디오 연출을 하는 메인 연출 밑의 연출이다. 조연출로 강등 당한 셈이지만 후회도, 미련도 없다. “앞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없고 빛이 나는 작품을 할 기회도 회사에서 안 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내 꿈은 PD도 스타PD도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래요. 하루하루 재밌게 사는 게 꿈이죠. 그래서 고민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재밌게 살 수 있을까.”

 그는 스스로를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에게 있어 중대한 선택의 순간에 유일한 기준은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대학시절 문과 적성이던 그는 전공 공부가 싫었다. 전공 공부 대신 일 년에 200권씩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고, 연애를 했다. 취직을 하려고보니 2점대인 그의 전공 학점을 용서하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 3M에 외판원으로 어렵사리 첫 직장을 구했다. 하지만 직장 상사도, 스물 다섯에 그의 인생이 좁은 사무실 안에서 다 정해졌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2년 만에 사퇴 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퇴 후 외대 통역대학원 입학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대학원에 합격한지 1년 후 그는 광고를 보고 충동적으로 MBC PD공개채용에 지원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당시 면접을 그의 저서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올해 본 MBC 프로그램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없습니다.” “왜요?” “TV를 보지 않거든요.” “그런데 왜 PD에 지원한 겁니까?” “저처럼 TV를 보지 않는 사람도 재미있게 볼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서요.” “대학 학점도 3.0이 안 되는데요?” “사춘기가 좀 길었지요.” “MBC에 지원하면서 낮은 성적이 걱정되진 않았나요?” “대한민국 시청자가 4000만인데, 하나같이 공부 잘한 PD들이 만드는 프로그램만 보겠습니까? 저처럼 잘 노는 사람이 만드는 프로그램도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 예능 PD가 되고 싶냐는 면접관의 질문에는, “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게 삶의 보람입니다. 셋이 만나면 셋을 웃겨야 하고, 열이 모이면 열을 웃기는 게 낙입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온 국민을 웃겨보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면접관이 피식 웃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민식 씨를 안 뽑을 건데?” “그럼 지금처럼 제 주위 친구들을 웃기며 살면 되지요.” 

예능PD로서 파업, 드라마PD로서 그 후

 그는 그와 같은 사람을 채용한 MBC가 정말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공정방송, 문화방송으로 격이 있는 뉴스를 만드는 MBC가 정말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MBC 파업에 참여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가 회상하길 파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MBC 뉴스가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FTA) 반대 집회에서 물대포가 발사된 사실을 보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방송사들은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물대포가 발사되었음을 보도했다. 이후 MBC 기자가 취재를 나갔는데 시민들이 “뉴스에 내보내지도 않을 거 왜 찍느냐”며 기자를 쫓아낸 일이 있었다. 그는 그의 울분을 표현한 글을 보도국 기자들 게시판에 업로드 했지만 상부에서 글을 삭제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기자는 굴복하지 않고 MBC 전체 구성원에게 공개된 노조 게시판에 글을 올려 이를 알렸다. MBC 방송이 정권을 감시하는 언론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김재철 사장이 취임한 후 부터였다. 당시 언론 자유의 탄압이 정점에 달한 사건은 파업 1년 전 피디수첩의 PD 6명이 한꺼번에 교체된 일이었다. MBC 언론의 공정함과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프로그램을 이끌던 사람들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파업을 할 것 같아요. MBC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죠.” 그렇지만 그는 대학시절의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냈지 데모를 하지는 않았으며 그가 PD로 있는 부서도 정치와는 무관한 예능국 그리고 드라마국이다. 2011년, 그런 그에게 노조 집행부 제의가 들어왔다. 다들 선뜻 나서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임기를 1년 남겨둔 상황에서 분명히 언론 통제가 심해질 것이며 노조를 가입하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오리라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김민식PD는 집행부의 연락을 받았을 때 “오죽하면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정말 급하신가봅니다”라며 큰 고민 없이 응했다. 그에게는 단순히 하고 싶으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그가 노조 부위원장으로 임하며 시작된 2012년의 MBC 파업은 전 조합원들의 싸움이었다. 장장 170일 동안 계속되었다. 

 “전 세계 어디에도 노동조합 역사상 170일을, 그것도 전 조합원이 월급을 받지 않으면서 싸운 기록이 없어요.” 40대의 조합원들이 단식농성을 하면서 몸이 망가지고 급여 없이 은행 잔고가 망가지면서도 반년의 기간을 버틴 것은, 즐겁게 싸웠기 때문이었다. 1월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프로그램 총연출을 맡게 되었는데 그 때 제작한 것이 이다. 서울대 학생 김정현씨가 서울대 총장실 점거 농성을 알리기 위해 만든 영상 <총장실 프리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그렇게 <이태원 프리덤>을 개사한, 발랄한 립덥 뮤직비디오가 탄생했다. 그의 기획으로 조합원들은 뮤직비디오 촬영뿐만 아니라 노래와 플래시몹을 하며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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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김민식 PD ⓒ 유투브 영상

 파업 당시 검찰은 그에게 구속영장을 두 번 청구 했다. 두 번 다 기각됐다. 노조원들 중 6명이 해직을, 38명이 정직을 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부서가 재배치되거나 직위가 강등되었고 소속 부서 자체가 해체되기도 했다. MBC 뉴스데스크에는 파업 이후 새로 채용된 대체인력이 절반 이상 충원되었다. 그의 경우에는 일을 받지 못했다. 급여가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굴욕인 징계가 없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렇게 일 없이 3년이 지났다. 그때 정약용이 유배시절 남긴 글을 읽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제 가문이 망했으니 너는 이로써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영합하는 글을 안 써도 되고 정말 내가 읽고 싶은 글을 마음껏 읽으면서 살면 되지 않겠냐는 거죠. 어차피 출세의 길은 막혔으니 선비의 삶을 살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3년간 그는 개인블로그에 글을 쓰고 유투브와 팟캐스트를 공부하는 데에 매진했다.

 김민식 PD는 언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블로거와 유투버, 팟캐스트 프로그램들이 해낼 수 있으며 실제로 어느 정도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미디어란 네트워크 더하기 콘텐츠에요. 전국에 신문 배급망을 가진 신문이라든지 공중파 네트워크를 가진 방송사.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네트워크가 정해져 있으니까 그곳으로 콘텐츠를 가진 개인들이 가야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무료 네트워크가 인터넷에서 마음껏 제공되잖아요.” 아직 우리나라의 미디어는 해외만큼 전문적이지도 않고 파급력도 크진 않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해외 사례도 오랜 발전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가 MBC나 다른 언론에 대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땡전 뉴스’라는 게 있었어요. KBS나 MBC나 아무 차이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1987년 민주화 투쟁이 있고 그 힘을 받아서 1989년에 만들어진 게 MBC 노조예요. MBC뉴스가 땡전뉴스에서 변모한 것이 10년 사이의 일이 라는 거죠. 지금 우리가 안 좋은 시기를 거치고 있다면 살리는 것도 10년이면 된다고 믿어요. 천 명의 조합원들이 버티고 있어요.” 

 김민식PD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 MBC가 좀 더 좋은 언론이 되는 것, MBC 조합원들이 즐겁게 일을 하는 것, 해고자들이 복직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여왕의 꽃>이 끝나면 아버지와의 뉴욕 여행, 나 홀로 제주도 올레길 여행, 그리고 첫째 딸과의 미얀마 배낭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아직 일하는 게 재미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제일 하고 싶은 걸 해요. 그러니 사는 것도 재미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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