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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병 강제징집과 민간인에 대한 사지절단이 다반사로 일어났던 시에라리온 내전은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불린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창출하는 막대한 이권이 분쟁의 씨앗이었다. |
2008년 2월 21일 오전 9시 30분,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 국제형사재판소(ICC) 별관에서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이 열렸다. 시에라리온 내전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전범재판소의 성격을 띠고 있는 특별법정에는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기소돼 있다. 이날 테일러 전 대통령은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착용한 말쑥한 모습으로 법정에 나타났다. 그는 국가원수의 면책특권 등을 이유로 재판을 거부해 오다가 지난 1월에 재판절차를 전격 수용하고 법정에 출석해 오고 있다. 곧이어 재판부가 입장했고, 전날 마치지 못한 검사 측 증인에 대한 심문절차가 개시됐다.속속 드러나는 테일러의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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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주도한 혐의로 특별법정에 기소된 찰스 테일러 전 라이베리아 대통령 |
“찰스 테일러 전 대통령과 시에라리온 반군 혁명연합전선(RUF) 지도자 포데이 산코(Foday Sankoh)는 긴밀하게 연락하는 사이였다.” 증인 포데이 란사나(Foday Lansana)는 다소 어눌한 말투로 증언을 이어나갔다. 그는 RUF 소속 통신암호기술자였다. 그가 암호문 송수신의 메커니즘과 암호의 개발방법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이어나가자, 테일러 전 대통령의 얼굴에는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곧이어 물증이 제시됐다. 검사 측이 입수해 법정에 제시한 증거자료는 암호문이 빼곡이 적혀 있는 노트였다. 증인 란사나는 그 노트가 정부군 공격과 인명살상 지시 등을 위한 암호문 송수신에 실제 사용됐다고 밝혔다. 재판정은 일순간 술렁였지만 검사측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심문을 계속했다. 테일러 전 대통령의 내전 개입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대체 어떤 기막힌 사연이 숨겨져 있길래 일국의 대통령까지 지낸 이가 이웃나라 내전의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정에 세워지게 됐을까? 테일러 전 대통령은 아프리카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국제재판에 회부됐으며, 그가 받고 있는 혐의들도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하는 중차대한 것들이다. 사건의 전말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다이아몬드가 피를 부른 시에라리온 잔혹사테일러 전 대통령은 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이 후원하는 게릴라 훈련캠프인 타주라 군사훈련학교에서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수학했다. 이어서 그는 1989년에 라이베리아 민족애국전선(NPFL)을 창설했다. 그는 오랜 기간 무장게릴라 활동을 벌인 것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업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됐다.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등이 위치한 아프리카 북서부 지역은 전세계 다이아몬드의 20% 가량이 생산될 만큼 광물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 내전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창출하는 막대한 이권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어 왔다. 테일러 전 대통령 역시 권좌에 오른 뒤 라이아베리아보다 훨씬 풍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웃나라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에 눈독을 들였다.그는 자국의 다이아몬드를 팔아 생긴 돈으로 이웃나라 시에라리온 반군 RUF에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RUF의 지도자 산코는 그와 타주라 군사학교에서 동문수학하던 ‘혁명동지’였다. 테일러 전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은 RUF는 파죽지세로 시에라리온의 주요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1991년부터 계속돼 온 시에라리온 내전은 걷잡을 수 없는 혼전 양상으로 빠져들었다.소년병 징집에서부터 손목 절단까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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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다이아몬드는 반군들이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이 강했지만, 점차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서 참극을 낳기 시작했다. RUF는 교전 과정에서 반대 진영 주민들의 손목과 발목을 도끼로 자르는 만행을 조직적으로 저질러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 손으로 현 정부에 투표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농경사회인 아프리카에서 손목이 잘린다는 것은 생계수단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소년병 징집도 일상화됐다. 10살 미만의 아이들이 반군에 납치돼 군사훈련을 받고, 교전에 동원됐다. 반군은 겁에 질린 소년병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켰고, 때로는 마약을 먹였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자기가 살던 마을에 총질을 했고, 자기 손으로 부모와 형제를 죽여야 했던 아이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았다. 돌아갈 곳을 잃은 아이들은 어느새 어엿한 반군의 일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납치된 여자 아이들은 낮에는 허드렛일을 도왔고, 밤에는 성적 노리개로 이용당했다.그렇게 10년가량 계속된 시에라리온 내전은 최소 5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체 절단이나 고문 피해를 입었다. 내전은 국민 500만 명 가운데 200만 명 이상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내전으로 삶의 공간은 처참히 파괴됐고, 주민들의 삶의 질은 바닥에 떨어졌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국가별 평균수명과 교육수준, 국민소득 등을 종합 평가해 매년 내놓는 ‘인간개발지수’에 따르면, 시에라리온은 2007/2008 조사에서 전세계 조사대상국 177개국 가운데 최하위인 177위를 차지했다. 국민소득은 806달러, 기대수명은 41.8세에 불과하다.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산지이면서도 ‘피에 찌든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시에라리온의 이야기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2007년 개봉)로 만들어져 화제를 낳기도 했다. 이 영화는 올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4개 부문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의 이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으면서, 1787년 영국에서 이주해 온 해방된 노예들이 주축이 돼 탄생한 시에라리온은 정작 오늘날까지도 전쟁과 기아의 공포로부터는 해방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한 나라의 대통령이 이웃나라 전범재판에 세워지기까지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테일러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국내에서 저지른 각종 잔혹행위와 시에라리온 내전을 주도한 일로 말미암아 국내외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가 대통령직에 오른 지 2년 만인 1999년 라이베리아에서는 새로운 반정부단체 화해-민주주의를위한라이베리아연합(LURD)이 구성됐고, 라이베리아는 다시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그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반군 소탕작전을 준비했으나, 이미 민심은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2001년에는 시에라리온 내전에 무기를 지원한 일로 인해 유엔 차원의 제제 결의안이 통과됐고, 테일러 전 대통령은 2003년 6월에는 급기야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에 기소되기에 이른다. 그는 2003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나이지리아로 망명을 떠났다. 시에라리온 내전의 진상이 점차 드러나고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이 높아지자 그는 비밀리에 망명지에서 도주했으나, 2006년 3월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의 접경지역의 검문소에서 전격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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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러 전 대통령 전범재판이 열리고 있는 헤이그 소재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의 풍경. 전문가들은 재판이 앞으로도 2년 가량 더 소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은 시에라리온 내전사태의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1996년 11월 유엔과 시에라리온 정부가 공동으로 구성했다. 첫 재판은 1998년 시작했으며, 재판소는 시에라리온 수도인 프리타운과 네덜란드 헤이그에 두 곳 개설돼 있다. 특별법정은 테일러 전 대통령이 프리타운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시에라리온의 정정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 그에 대한 재판절차를 헤이그에서 밟고 있다.지난해 7월 프리타운에 위치한 특별법정은 소년병 강제징집과 살인, 성폭행 등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시에라리온 반군 지도자들에게 45년에서 50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무기를 지원했고, 온갖 전쟁범죄를 실질적으로 조종한 혐의를 받고 있는 테일러 전 대통령에게는 어떤 판결이 내려질까.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를 포함하는 그의 11개 혐의를 놓고 검사 측과 테일러 변호인단 측이 오늘도 논박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국제사회의 눈과 귀는 헤이그로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