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이 한 당의 대표 사무실일까? 서울대인이 뽑은 진보적 인사 4위, 권영길 씨와의 인터뷰는 좁은 탁자 위에 옹기종기 앉아,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씩 들며 시작되었다. [기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고요, 서울대생이 뽑은 ‘한국의 대표적 진보 인사’ 중 4위에 뽑히셨는데 어떠세요? [대표] 왜 4위밖에 안 되죠? 섭섭하네(웃음). 글쎄요. 서울대생들이 어떤 기준으로 진보적 인사를 선정했는지 궁금하네요. [기자] 그럼 권 대표님은 진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대표] 저는 진보라는 개념은, 그 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진보라고 한다면 최소한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초국적 자본이 전파시키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 즉 신자유주의를 반대해야 합니다. 또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강화시키는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찬성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경제를 크게 왜곡시켜온 재벌 구조 해체에 동의해야 합니다. 서울대생들은 어떤 기준으로 진보인사를 뽑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와 같은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진보라고 판단하기 힘들 것 같군요. [기자] 한국의 진보를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야 될 과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대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노동, 사회 정책이 바람직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근본적으로 더욱 어려워집니다. 우리가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일하는 사람들이 직장을 잃을 걱정을 최대한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제도적, 법적 틀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하면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런 질문은 이미 신자유주의의 수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상황에서 대안은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대안입니다. [가자]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표]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정당이 없었습니다. 한국 정치는 금권부패, 지역주의, 보스 정치와 같은 고질적인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바꾸어 내는 것이 정치개혁입니다. 정치개혁 없이는 경제개혁도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민주노동당이 위상을 강화하여 합리적인 보수 정당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기자] 그렇다면 하나의 진보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자평하시나요? [대표] 민주노동당은 첫째, 민주적 절차에 의해 창당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유일한 정당입니다. 당 내 모든 일이 절대적으로 민주적인 체제로 운영됩니다. 또한 국내 최초로 당비를 내는 보통당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수적 언론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활동모습을 알려내지 못해 운동권적인 정당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특히 많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었으면 합니다. [기자] 진보신당을 창당한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대표] 네…보수 언론의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민주노동당은 국회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여타의 정치적 조직체, 진보 단체, 개인, 양심적 지식인들을 총망라할 수 있는 범진보진영의 활로를 개척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신당논의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고요. [기자] 사회당과의 연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대표] 사회당도 기본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국민의 투표성향을 보면 진보정당을 찍는 사람은 5% 미만입니다.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방해와 극소수의 지지율 속에서 두 진보정당이 나누어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냉전논리가 지배하는 한국의 상황에서 두 개의 진보정당이 얼마나 서로 차별성 있는 강령을 내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실정법에 따라 정당을 결성하고 선관위에 신고한 합법 정당이라면 정책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일각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대표] 우리는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입니다. 누군가 비합법혁명에 의한 권력장악을 추구하고 이를 위한 비합법조직이 있다면 그들은 민주노동당이 개량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합법정당이 필요하고 선거 또는 국민적 지지에 의해 정권을 획득해야 한다면 지금 민노당의 활동 중에 무엇을 개량이라고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할 것입니다. [기자] DJ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대표] 김대중대통령은 통일의 길을 넓히고 남북간 긴장을 완화시키면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성과입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은 이 역사적 성과를 넘어서는 중대한 역사적 과오를 범했습니다. 바로 한국의 경제체제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공고화시킨 것이죠. 이미 한국의 모든 은행, 흑자를 내던 대다수의 국영 기업체, 알자 기업들이 외국인 손으로 넘어 갔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20년 정도 고난의 길을 걸어 이 사슬을 끊을 것이나 아니면 행후 100년 동안 예속국으로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기자] 지난 97년 대선과 마찬가지로 내년 대선에서도 ‘비판적 지지론’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주당의 개혁적 후보와 민주노동당의 후보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민주노동당의 후보에게 표를 던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대표] 민주당의 가장 두터운 지지층이 20대라고 들었어요. 이들 대다수가 대학생이겠죠. 안타깝습니다. 비판적 지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는 것보다는 민주당이 집권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차이가 있다는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 특히 남북문제나 통일관에 있어서 그렇죠. 그러나 아까 제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진보의 기준, 즉 신자유주의에 관한 한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모든 투쟁의 총화이고 모든 개혁의 총화라고 한다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그러면 민주노동당이 집권 가능성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집권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100만표만 넘으면 새로운 정치흐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집권을 못하더라도 사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역사는 하루 아침에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죠. 한단계 두단계 힘이 모여 세상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기자] 좀 개인적인 질문인데..권 대표님의 젊은 시절은 어떠셨나요? [대표] 고뇌하고 술 마시고 여행하고..그러고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생활은 그리 즐겁지 못했어요. 고등학교 때 농민운동 하려는 생각이 좀 있어서 농민운동을 하려고 농과대학에 들어갔는데 대학 공부는 제가 배우고자 했던 것들이 아니었죠.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서 곧 군대에 갔고 제대 뒤에는 특별히 대학생활이라 할만한 것 없이 지냈던 것 같아요. [기자] 마지막으로 서울대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대표] 기능적 서울대생이 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네요. 광복 후 독재정권의 손발이 되었던 것이 바로 머리 좋은 서울대생이었어요. 지금도 한국 사회를 망치고 있는 기득권층은 서울대 출신들이죠. 서울대는, 서울대 후배들은,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틀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틀 속에서 그나마 가장 혜택을 받을 것은 서울대생이란 말이죠. 서울대생은 이 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서울대생은 창조적이고 선구자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역사발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사시길 바랍니다. 확실한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힘들지만 동시에 즐거운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