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 다수의 서울대인에게 고(告)함

운동권이 컬트가 되어버린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본다.이제 운동은 누군가의 미래를 가로막을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어가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부모와 교수를 비롯한 어른들로부터 그들 컬트인들은 곱지않는 시선을 감내해야만 한다.나는 지금, 민주주의의 다양성 존중에 관해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운동권이 컬트가 되어버린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제 운동은 누군가의 미래를 가로막을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어가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부모와 교수를 비롯한 어른들로부터 그들 컬트인들은 곱지않는 시선을 감내해야만 한다. 나는 지금, 민주주의의 다양성 존중에 관해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나 – 다수에게 고함 언제부터인가(아마도 내 아래의 후배가 내 위의 선배보다 많아지기 시작할 때부터 인 것 같다) 운동경력은 군대 생활을 회자하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로 들리게 됐다. 개인의 사사로 울 수 있는 단상이 꼭 먹혀야 한다는 아집과 특정 정파의 의견이 다른 정파의 의견을 제압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의 토로가 운동으로부터 소외되어온 사람들에겐 오직 “싸 움”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을까하는 기우와 더불어. 안타깝게도 지금 서울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논쟁의 장을 ‘건전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 군대이야기를 가지고 여성들의 소외감을 논했던 때가 오버랩 된다. 군 대이야기(조금 더 보태자면 축구이야기까지)로부터 받을 여성들의 소외감은 소위 비권들이 가질 수 있는 소외감과 과연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을까? 설득의 대상은 학우이겠지만 논 쟁의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 그건 아마도 “누구(who)”가 아니라 “무엇(what)”이어야 한다. 둘 – 또 다른 다수에게 고함 도서관 집회 문제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난 그것을 보면서 또다시 오버랩 시킨 것이 있 다. 만약에 1300원짜리 학생회관 밥이 지하로 내려가고 계절학기 수업료가 수십퍼센트씩 기 습 인상이 되고, 등록금이 몇십만원씩 아무런 저항없이 올라간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할까? 민중생존권과 신자유주의, 반미투쟁, 쌀개방, 철거촌, 반전, 성폭력, 장애인, 환경문제, 통일운 동 등의 거시적인 문제만 아크로에서 벌어지는 것은 아닌데.. 그러나, 도서관의 하루짜리 시 끄러운 집회로 1300원짜리 학생회관 밥을 1층에서 먹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내 어버이의 피땀섞인 등록금을 낮출 수만 있다면, ‘돈맛을 알아버린 본부’에게 한마디 외침이라도 우리 가 한번 제대로 외칠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뿐만 아니라, 모두가 최소한의 생 존권을 가져야 하고, 죽음을 부르는 전쟁을 반대해야 하고, 성적 불평등을 해결해야 하고 소 외된 자들의 서러움을 알려야하고, 우리의 환경권을 지켜야 하고, 분단의 현실을 직시해보아 야 하고, 이것들 모두를 누군가에 촉구해야 한다면… 아크로는 있어야 한다. 방음벽은 없어 도 아크로는 있어야 한다. 셋 – 불특정 다수에게 고함 지금의 서울대는 바야흐로 언어폭력의 시공이다. 익명을 무장한 체, 시도되는 온라인에서의 욕설과 비대면을 조건으로 행해지는 비하적 발언, 그리고 뭔가 있어보이는(그 뭔가는 아무 도 모른다) 욕설섞인 선본의 이름까지. 적어도 나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도 미학이 되는 시대인데, 욕설은 미학이 아니되겠느냐 ! 그러나 “지지합니까?”라고 누군가 묻 는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하겠다. 그 이유는 아주 명쾌하다. 조까트니까. 앞서 언급한 ‘민중생존권과 신자유주의, 반미투쟁, 쌀개방, 철거촌, 반전, 성폭력, 장애인, 환 경문제, 통일운동’을 써내려가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생각을 했다. 결국 우리 모두 각자는 과연 그것들 중 무엇에 관심있는가라고 묻고 싶었다. 없어도 괜찮다. 그러나 그 수는 작았으 면 하는 바램이 있고, 최소한 하나라도 선택할 수 있는 당당함이 간절하다는 이야기다. 그것 이 너무나도 조급한 나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수많은 난제(難題)들을 하나하나 풀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는 것이 그간 지령 50호를 끌고왔던 서울대저널이 품은 저널리즘 일 것이다. 누구나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아있다면 자기자신만의 좌표를 갖는다. 그 좌표는 다른 좌표에게 부당하게 침범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다른 좌표를 부당하게 침범하지 않을 의 무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좌표를 엮어내는 것은 결국 함수다. 결국 우리가 모를 어떤 함수 가 우리모두를 암울한 지점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그 함수의 방향은 반드시 돌려놔야 하는 것이며, 아마도 50권의 서울대저널은 그것을 풀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감히 자축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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