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연재코너에서는 서양에서의 혁명사를 다루고 있다. 근대 서구사회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이중혁명’의 과정을 통해서 탄생하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정치적인 격변인 시민혁명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이념적 이행의 과정에 있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의 혁명을 되짚어 보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의 시민혁명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1. 혁명의 고전, 영국혁명 2. 연방국가의 탄생, 미국혁명 3. 상퀼로트와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 |
이라크전쟁과 북핵문제, 최근에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의한 폭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미국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나라이다. 비단 학자가 아닐지라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지도를 보면, 이런 궁금증이 들지 않는가? 어떻게 우리나라만한 혹은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진 ‘주(state)’들이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거대한 미국이라는 이루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미국 건국에 대한 많은 이미지들이 과연 진실일까? 미국 혁명, 미국의 독립과 건국 과정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한 시간 여행을 시작해보자. 메이플라워호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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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카혼타스 – 유럽에서온 이주민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과 충돌을 배경으로 해서 만든 에니메이션 |
미국의 역사교과서에는 미국의 건국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영국에서 국교회에 의해 종교적인 자유를 빼앗기고 탄압을 받던 청교도들이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그들은 신대륙에 도착해서 정착을 시도했지만, 도착한 첫 해 겨울에 식량을 마련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원주민들이 식량을 제공해주었고, 이듬해 농사 짓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해 가을 추수를 마치고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을 초청해서 축제를 열고, 첫 추수를 무사히 마치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미국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의 유래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의 땅, 자유로운 나라’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화이다. 실제로는 한 모험가에 의해서 1585년 버지니아가 발견된 이후에 1607년 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신대륙에 건너와서 정착을 시작했고, 그들은 그곳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정착민들은 그곳에서 담배 재배를 시작하였고, 1619년에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납치해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유로울 것 같았던 나라에서 노예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갈등을 소재로 해서 만든 에니메이션이 바로 ‘포카혼타스’이다. 독립을 향한 ‘만들어진’ 열망 최초의 정착이 이뤄지고 약 100년 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식민지들은 분화와 발전을 거듭하였다. 미국 동부에 자리 잡은 13개의 식민지에 대해서 영국은 적극적인 관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7년 전쟁 이후 식민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 생겨나고,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식민지에 대한 과세를 늘려나가게 된다. 특히 영국 정부는 차에 대한 세금을 식민지에 끝까지 부여하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저항으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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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턴 차 사건의 진실 – 몇몇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조장되었다. |
하지만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할 점은 이러한 과격한 저항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기 보다는 몇몇 급진적인 인물에 의해서 선동, 주도되었다는 측면이다.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조작하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과장되었다. 1770년 보스턴에서 영국 군대와 식민지인 사이에서 일어난 유혈충돌을 미국인들은 ‘보스턴 대학살’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일까? 미국인들의 인권관념이 워낙 철저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이 사건을 통해서 사망한 미국인의 수는 4명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항해법 – 수출입에 무조건 영국배를 이용하게 하는 – 이 미국의 독립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분명 미국의 상인들은 모여서 영국 정부가 취한 조치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항해법으로 인해서 미국이 입는 소비자잉여의 상실은 국민소득의 1%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과장된 사실들로 인해서 영국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서서히 커져갔다. 실제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영국왕이었던 조지 3세에 대한 적개심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미합중국: 거대한 연방국가의 출현 현재 미국은 각 주 정부들이 하나의 중앙정부에 예속되어 있는 연방국가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초창기부터 이러한 결속력을 가진 하나의 단위체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이 끝난 시점까지도 13개의 식민지들은 제 각각 독립적인 단위체를 이루고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이후 연방정부의 수립을 놓고서 미국 내부에서 일대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연방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반연방파들은 식민지의 느슨한 연합으로도 영국이라는 강국에 대해서 승리했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더 강한 중앙권력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연방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연방파 인사들을 ‘음흉한 권력욕에 가득 찬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들은 미국이 영국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저항해서 독립을 달성하였는데, 연방정부는 영국 정부를 대체하는 또 다른 억압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주’와 ‘연방’의 이중적 권력구조가 결국 연방의 권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는 반대로 연방파들은 연방정부 수립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연방파들은 주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신생공화국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방정부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신생국 미국이 수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호무역정책이 필요한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연방정부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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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연방국가 미국 – 각 주가 모여 하나의 연방을 형성하는 체제가 처음부터 마련되었던 것은 아니다. |
1788년 연방파의 주장이 많이 받아들여진 연방헌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반연방파의 주장 역시 수정헌법조항을 통해서 일부 반영되었다. 또한 미국의 독특한 선거제도에도 연방파와 반연방파의 타협의 산물이 숨어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의 형태로 치러진다. 선거인단의 수는 각 주의 유권자 수에 비례해서 결정되지만, 한 주 안에서는 최다득표를 한 후보가 그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하게 된다. 이는 인구가 적은 남부 농업지역 – 반연방파 지지 지역-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치인 것이다. 이 독특한 제도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더 많은 유권자의 표를 획득한 후보가 패배하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조지 부시와 앨 고어가 격돌한 2000년 대선에서도 고어가 더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시가 당선되었다. 자유의 나라 미국의 어두운 이면: 노예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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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노예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 – 영화 아미스타드를 통해서 그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흑인들을 상품이나 재산으로 취급했음을 알수 있다. |
미국 혁명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뤄진 혁명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자유로운 나라’로서의 이미지를 획득했고, 미국인들은 유럽의 구체제국가들에 대해 우월성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안고 있었던 어두운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노예제 문제였다. 이 문제는 남북전쟁을 통해서 북부가 승리하고,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할 때까지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이것은 미국 혁명이 가지는 커다란 한계점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근대,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비유럽지역과 비유럽인에 대해서는 그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많은 미국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노예들은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생산을 위한 도구였다. 북부의 사람들도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긴 했지만 흑인인권에 대한 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흑인노예의 노동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농장경영이 주를 이루던 남부와는 달리 공업이 발달한 북부로서는 노예제의 폐지로 자유민 노동자들이 증가하는 것이 더 이익이었던 것이다.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왜곡된 시각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서 미국 내 인종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자유, 권리’ 등을 기반으로 했던 미국혁명이 타 인종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은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