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 잔 다르크’ 페트라 켈리

지금 독일의 여당은 사민당과 녹색당이다.연립정권을 이루는 한 축인 녹색당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환경, 평화문제에 대해 주로 목소리를 내는 당이다.1980년에 창당한 뒤 1998년 사민당과의 ‘적록연정’을 이룬 이래 녹색당은 환경세를 도입하고, 자동차 휘발유 가격을 인상하였으며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없애는 정책을 도입하는 등 환경 운동에 많은 정책을 실현하고 있다.
###IMG_0###

지금 독일의 여당은 사민당과 녹색당이다. 연립정권을 이루는 한 축인 녹색당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환경, 평화문제에 대해 주로 목소리를 내는 당이다. 1980년에 창당한 뒤 1998년 사민당과의 ‘적록연정’을 이룬 이래 녹색당은 환경세를 도입하고, 자동차 휘발유 가격을 인상하였으며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없애는 정책을 도입하는 등 환경 운동에 많은 정책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녹색당을 만든 사람이 젊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녹색운동의 영웅 페트라 켈리(Petra Kelly)가 이번 기사의 주인공이다.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페트라 켈리는 양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대학교육까지 받을 때 까지 페트라 켈리는 평범치 않은 학창생활을 보냈다. 중, 고등학교 때 학교 치어리더로 활동하면서도, 이미 지역 언론들에 틈나는 대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으며, 학생회 간부로서도 많은 일을 해냈다.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를 전공하면서 그녀는 외국인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학생회 임원에 선출되었고 로버트 케네디, 휴 험프리 후보 등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을 도우면서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를 함께 해나가는 것을 익혔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녀는 유럽공동체에 사무관으로 취직되어 브뤼셀에서 일하게 된다. 이 때부터 그녀는 본격적으로 환경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녀가 제일 관심을 갖고 열심히 활동하던 쪽은 반핵, 반전운동이었다. 당시 냉전하의 유럽에서 반핵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암으로 죽은 어린 이복동생 그레이스가 방사능 치료 과정에서 겪은 고통으로 보인다. 그녀는 실제로 방사능과 암의 관계를 연구하고 암에 걸린 아이들을 지원하는 ‘그레이스 켈리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1970년에 뉴욕에서 열린 ‘방사선-암의 관계’ 토론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유럽 각국은 물론 호주나 일본까지도 다니면서 수많은 반핵 집회, 강연에 참여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냉전 체제 하에서 유럽에 핵무기나 미사일이 배치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 핵에너지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핵발전소 건립 반대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평생의 연인 게르트 바스티안을 만난 계기도 반핵운동이었다. 바스티안은 나토군 사령관을 지낸 군인이었지만 나토가 퍼싱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미사일 배치가 소련에 대한 선제공격 능력을 갖게 되어 힘의 균형을 깬다는 이유로 그는 예편해버린다. 이로 인해 반전 운동의 영웅이 된 바스티안은 일년 뒤 페트라 켈리를 만난 후 아버지뻘에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이자 동지로서 평생 페트라 켈리와 함께 했다. 어디를 가든 붙어 다녀 한 몸과 같다는 페트랑게르트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들은 그러나 훗날 함께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페트라 켈리가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한 것은 1972년이었다. 당시 독일 전국의 반전, 환경단체들이 모여 ‘시민주도 환경보호 전국연합(BBU)’ 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페트라 켈리가 중추적으로 활동했던 이 모임은 1980년에 녹색당이라는 정당으로 발전하여 의회에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다. 여러 나라의 녹색당들이 함께 추진했던 유럽의회 선거나 독일연방의회 선거등에 도전하면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의 지방의회 선거들에서 성과를 내기 시작하더니 1983년 5.5%의 지지를 얻어 연방의회에 27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물론 27명의 명단에는 페트라 켈리와 게르트 베스티안도 들어 있었다. 연방의원이 된 페트라 켈리의 활동은 더욱 왕성해졌다. 창당한지 얼마 안 된 녹색당의 조직을 확고히 하는 한편 연방의원이라는 자리에 오르고서도 페트라 켈리는 변함없이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설치하거나 핵발전소를 지으려는 시위는 챙겨 다녔다. 한편 독일 녹색당의 의원으로서 국내외의 환경, 평화운동에도 의원으로서 참여해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미국과 영국, 아일랜드등을 오가며 각국의 녹색운동가들과 만나 그들과 의견을 나누는 등 환경, 평화운동의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는데 노력했다. 특히 동독의 평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를 만나 구속된 환경운동가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티베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직접 인도에 가 티베트 독립운동가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단체에서 일할 때는 지치지 않았던 페트라 켈리가 정당에서 일하게 되면서 지치기 시작했다. 항상 원칙주의로 일관했으며 즉흥적으로 행동했던 페트라 켈리에게 획일적이고 당이라는 범위안에서만 활동해야하는 정당 활동은 맞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페트라 켈리는 시민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의회 의사당에서는 평범한 의원일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1989년 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점점 녹색당과의 유대를 잃어갔고, 결국 90년대 들어 녹색당에서의 지위도 상실하였다. 모든 공식적인 직함을 잃고서도 그녀는 독일 민영방송에서 환경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쉬지 않고 활동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페트라 켈리는 1992년 침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평생의 연인 게르트 바스티안은 복도에서 죽어 있었으며 손에는 권총을 쥐고 있었다. 이들의 죽음을 놓고 논란이 분분했지만 경찰은 이들의 동반자살로 결론을 내렸다. 평생 반전, 환경운동에 매진했던 페트라 켈리, ‘녹색의 잔다르크’라고 불렸던 그녀이지만 그녀 역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다. 선거에서 떨어지기도 했고 그녀가 만든 녹생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실패에도 항상 자신이 해오던 녹색운동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의지와 정신을 본받아 페트라 켈리 평화상이 제정되어 전세계 평화 운동과 환경 운동에 헌신하였던 이들을 격려해오고 있다. 페트라 켈리, 그녀는 그녀의 별명인 잔 다르크와 같이 녹색운동의 성녀로서 이 세상을 살다 떠났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전 기사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저희에게는 ‘우리’ 입니다.

다음 기사

홍준기의 저항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