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벌판 달려라, 광개토‘비적’

고구려사와 관련한 논쟁이 한창이다.중국의 ‘동북공정’ 발언은 마치 전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듯 강렬한 논쟁의 시발탄이 되었다.웹 상에 나타나는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기세가 단숨에 만주라도 수복할 듯하다.

고구려사와 관련한 논쟁이 한창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발언은 마치 전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듯 강렬한 논쟁의 시발탄이 되었다. 웹 상에 나타나는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기세가 단숨에 만주라도 수복할 듯하다. 10만원권이 새로 만들어진다면 그 주인공은 광개토대왕이어야 한다는 주장, 고구려의 기상이 지금 ‘우리’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주장, 광개토대왕비를 보호하기 위해 유리벽을 설치해 놓은 것을 중국의 억압에 갇힌 ‘우리의’ 역사로 표현하는 언론. 드디어 만주 벌판 달리는 광개토’대왕’의 시대가 오는가. 한국의 민족주의는 누가 보아도 감상적이다. ‘왜 민족을 중시해야 하느냐?’는 질문보다 항상 우선 되는 것은 ‘민족은 우리의 영혼이다’라는 명제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고구려사를 놓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논란 자체는 무의미하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경계가 생겼던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이지, 몇 천 년 전의 예전이 아니다. 지금의 잣대를 가지고 이전의 상황을 가늠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마치 한국 돈 100을 미국 돈 100과 맞바꾸는 것이 돈의 가치를 매기는 잣대가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흔히 드는 예를 이야기해보자. 조선 시대 때 조선의 노비와 중국의 양반이 축구를 했을 때, 조선의 양반은 누구를 응원했을까? 답은 ‘상식적’이게도 중국의 양반이다. 당시에 중요했던 개념은 조선인이라는 민족이 아닌 상놈이냐 양반이냐를 가르던 신분의 기준이었다. 이 때 조선 양반들은 ‘반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비민족적’일 뿐이다. 임지현 한양대 서양서학과 교수는 고구려사 논쟁에 있어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우선 첫째는 과연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향할 때 한국이 이길 수 있냐는 것이다. 냉정하게 따져, 극단적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때 한국이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 이것보다도 좀더 중요한 논거는 두 번째다. 민족주의는 항상 적대적 공존만을 전제로 한다. 내부의 단합을 강조하는 것은 그와 비례하여 외부의 타자화를 촉진시킨다. 동아시아의 현 상황에서 한국이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자기들만의 단결성을 추구한다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이나 중국 역시 민족주의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 한 세력의 성장은 필연적으로 다른 세력의 성장도 동시에 초래하는 만큼, 이들의 권력 다툼은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강조되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국민들이 유독 민족문제에 기세를 올리면서도 정작 민족주의가 자신의 발목을 묶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어렵게 알튀세르의 ISA 모형,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국가의 억압 기제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억압의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라는 ‘대민족적’ 슬로건 아래에서는 가부장제 하의 여성도, 부당한 노동 조건에서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도, 인간 취급을 받기도 힘들다는 이주노동자도 짓눌린 상태로 존재한다. 민족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어떠한 긍정적 효과도 외부에 대한 억압과 타자화를 기초로 한다는 점에 긍정될 수 없다. 흔히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바람직한’ 민족주의의 예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민족이란 미명 하에 개인을 동질화 시킨다는 점에서 나치의 반유대주의나 일본의 군국주의 논리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광개토대왕은 ‘한 쿠션 돌려 생각해’보면, 고구려 변경보다 조금 멀리 사는 사람들, 혹은 조금 가까이 사는 사람들(그 때는 땅을 가로지르는 철창으로 된 국경선도, 정확한 지도도, 측량 기술도 없었으니,)에게는 평화로운 농경지를 짓밟는 비적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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