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 맞은 한국연극의 파수꾼

1908년 11월 15일, 원각사(정동극장의 전신)에서는 한국 역사상 첫 연극인 ‘은세계’ 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그로부터 딱 백 년이 되는 2008년의 대학로에서는 지난 3월 27일부터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됐다.

1908년 11월 15일, 원각사(정동극장의 전신)에서는 한국 역사상 첫 연극인 ‘은세계’ 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딱 백 년이 되는 2008년의 대학로에서는 지난 3월 27일부터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됐다. 다채로운 공연으로 연극 발전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이 시점에서 묵묵히 우리 연극을 지켜 온 ‘파수꾼’, 극작가 이강백 선생을 만났다.신석정, 이청준, 여석기와의 인연으로 시작된 희곡의 길 이강백 선생은 1년에 한 편 꼴로 꾸준한 집필활동을 보여주며 한국 연극을 이끄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 왔다. 글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겸손하게 운을 뗐다. “사실 어느 때부터 글을 쓰게 됐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작가는 없을 거예요. 내가 언제서부터 글을 썼는지 나도 궁금해요.” 50여 년 전, 당시 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품게 되는 영웅 하나가 있었다. 전주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하고 있던 시인 신석정이었다. 전주고등학교를 다니던 이강백 선생의 형은 선생이 ‘끄적거린 것’을 선생님께 갖다드렸고, 어린 강백에게 돌아온 것은 자신의 시에 덧붙여진 신석정 선생님의 ‘잘 썼다’는 친필이었다. “아마 ‘어린애치고는 잘 썼다’는 뜻이었겠죠. 그래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내가 참 잘 썼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그렇게 그는 마음속에 새겨진 ‘영웅’의 친필과 함께 문학도의 열병을 앓게 됐다. 시에서 출발해서 소설, 희곡, 수필, 가리지 않고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이 당선됐고, 74년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라는 작품으로 최종심까지 올랐다. 결국 송기원의 가 당선됐지만 당시 심사위원이던 이청준은 못내 아쉬워 그의 소설을 문학잡지에 추천해 주겠다고 연락을 해 왔다. 그런데 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그를 뽑아줬던 심사위원 여석기는 ‘한국에는 소설가들이 많이 있는데 또 한명의 소설가가 되려 하느냐’며 희곡을 계속 쓸 것을 추천했다.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던 선생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청준에게 답을 했다. 소설은 외도였을 뿐이고 희곡만 쓰겠다고. “그때 소설가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극작가가 된 건 후회하지 않죠.”상상하며 읽으면 희곡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 하지만 사실 한국 희곡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현재 출판시장에서 문학이 외면되는 추세라지만 무엇보다 희곡이 가장 심각하다. 대사와 지문으로만 구성된 희곡은 독자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장르다. 하지만 그는 “무대를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상상의 배우들을 상상의 무대 속에 배치하고 성격도 부여하며 읽으면 솔직히 희곡처럼 재미있는 게 없다”고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읽은 희곡은 꼭 공연으로 봐야 한다. 자기가 생각하면서 읽었던 것과 무대 위에서 총체적으로 표현된 것을 비교하면 두 배의 효과가 아니라 스무 배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공연을 볼 텐데 왜 희곡을 먼저 읽느냐’며 희곡을 멀리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남이 연출한 공연만 보면 상상력이 위축된다”고 강조한다. 희곡은 읽는 사람이 상상한 만큼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이다.시대를 통찰하는 ‘알레고리의 작가’ 이강백 선생이 쓴 희곡의 변천사는 한국 현대 연극사 그 자체다. 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 80년대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 정권, 그리고 90년대에 들어 문민정부가 세워지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백기 없이 당시의 역사를 촘촘하게 담아냈다. 특히 , , , 등 70년대 초반에 발표된 작품들은 독재 권력을 우화적 기법으로 담아내면서 선생에게 ‘알레고리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동화적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이면에는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번뜩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된 에 등장하는 것은 너른 황야와 이리떼를 감시하는 높은 망루, 그리고 파수꾼이다. 마치 우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그 안에 비민주적 권력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를 예리하게 담아낸다.


90년대가 되면서 군부독재의 시대는 가고 선생의 날카로운 시각은 산업사회의 부조리한 현실로 향한다. 93년 작, 의 배경은 창고 안이다. 그 안에는 하루 종일 성실하게 일하는 창고지기 ‘자앙’과 일은 대충 하고 놀러다닐 궁리만 하는 ‘기임’이 있다. “산업 사회에서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공간 밖에 알지 못해요. 내가 판사가 하는 영역을 조금도 흉내낼 수 없고 판사는 극작가의 희곡 한 편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창고 속 창고지기들도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 채 일하죠. 아무리 성실하게 일한다고 해도 그 안에 든 것이 대량살상무기라면 성실과 정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상황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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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의 관객만이 관심을 갖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게 진짜 극작가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잘 노는 거죠, 뭐!

선생이 생각하는 예술은 ‘사람을 잘 놀게 해주는 것’이란다. “천상병 시인이 이 세상을 소풍으로 한바탕 재미있게 놀고 가는 거라고 했죠, 예술이라는 것도 사람이 한 세상 잘 놀다 가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요.” 사실 그도 20대에는 예술이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예술대학 교수가 되고 ‘예술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예술지망자들의 심정은 아주 절실하다 못해서 절박한 거죠. 식음을 전폐하고 그 일에 몰두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예술한다고 했다가 그 꿈을 못 이루는 사람은 불치병을 앓는 사람과 똑같아요. 그런 사람들에겐 예술 말고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해도 들어오지 않죠.” 그 고통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그는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 자체라고 생각하게 됐다.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만이 예술가라고 떠받드는 것도 그에게는 우습다. “예술은 별도의 생산자와 창작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즐길 줄 아는 모두가 예술가죠.” 사실 그도 이런 면에선 ‘내가 희곡을 안 썼다면 더 좋았겠다’고 느낄 때가 많단다. 공연을 관람하러 갔다가 어느새 직업적인 극작가의 눈으로 보면서 그 연극의 전체를 즐기지 못하고 있을 때면 놀라게 된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플롯과 캐릭터를 분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극작가가 아니었다면 보면서 몸이 진동하고 영혼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좋은 공연인데, 극작가의 눈으로 보니까 그 10분의 1이나 감동하기 어려워요. 어떻게 보면 오히려 예술을 지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그림에 대해, 조각에 대해, 음악에 대해 자신의 전 존재를 거기에 일체화하면서 예술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사유하는 연극을 꿈꾼다 그렇다면 점차 상업화되면서 티켓 파워를 지닌 작품만 조명되는 연극계의 현실에 대해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국 연극은 즐거움을 주는 대극장 공연과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지하의 조그만 소극장 공연으로 이분화된 상태다. 선생은 “많은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 연극도 필요한가 하면, 또 한자리에 모여 마치 밀교의 교인들이 예배를 보듯이 하나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해 보는 그런 연극도 의미가 있다”며 입을 열었다. “무엇이 더 나은 연극이라고는 말할 수 없죠. 하지만 소규모의 관객만이 관심을 갖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다룰 수 있는게 진짜 극작가라고 생각해요. 그건 돈 버는 것 하고는 정말 인연이 멀겠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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