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홉, 엔트로피 벗어나기

인류 역사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미와 추, 감정과 이성, 정신과 물질, 무한과 유한 등 두 원칙의 이항대립쌍이 세계관의 기본개념이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이다.그러나, 근대 이후에는 그 이항대립의 원칙이 몇 가지 독특한 면을 갖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미와 추, 감정과 이성, 정신과 물질, 무한과 유한 등 두 원칙의 이항대립쌍이 세계관의 기본개념이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는 그 이항대립의 원칙이 몇 가지 독특한 면을 갖게 된다. 첫째, 두 원칙의 이항대립의 경계가 그 전처럼 뚜렷하지 않고, 경계를 가르기 어려운 중간 지대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둘째 이항대립의 원칙 보다는 무수한 분열 양상이 부각된다는 점, 셋째, 이항대립쌍 중 어느 한 쪽이 더 이상 절대적인 우월성을 갖지 못하고 심지어 가치전도 현상까지 발생한다는 점 등이다. 이것은 이미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삶과 문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작가들, 특히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은 서구 근대 사회의 불투명성, 애매모호성, 분열성, 가치전도를 ‘악마성’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러시아적인 유기성, 총체성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근대의 ‘악마성’ ? 분열과 혼돈 – 을 극복하는 치유제로서의 러시아적인 총체성을 자신들의 문학뿐만 아니라 삶에 적용시켜가지만, 그 결과 그들은 삶과 작품에서 심한 위기를 겪는다.고골은 몇 차례 정신적 위기를 겪어가면서 이콘처럼 육체적인 몸을 영적인 몸으로 변형(transfiguration)시키는 성스러운 문학을 추구하고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불에 태우고 음식을 끊는다. 톨스토이와 도스또예프스끼 역시 평생에 걸쳐 영원한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강박관념과 육체적인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이 균열을 메우기 위해 극단적인 종교적, 정신적 구도의 길을 걷는다.체홉은 그들처럼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관념을 추구하지 않고, 다만 세계를 보는 믿을 만한 시선, 즉 인식의 형식만을 제시한다. 인식의 틀로서의 시선의 적합성만을 강조하는 점에서,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러시아적 정신’ 보다는 근대의 이중성과 모순성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유럽적 정신’ 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체홉도 ‘러시아적 정신’, 즉 이념과 현실 사이의 긴장과 대립 속에서 갈등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그 결과 이념지향적인 작가들의 특징인 이중성과 모순성을 공유한다. 그 예로, 그는 의사로서 지방에 자선병원을 짓고 적극적으로 의료 봉사 활동을 벌이면서도 20대에 이미 발견한 지병인 폐렴을 치료하지 않고 기꺼이 40대에 삶을 마감한다. 그토록 삶과 예술과 자연을 사랑하고 즐기는 작가가 자신의 병을 의도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그냥 죽기로 결정하는 것은 자못 아이러니컬하다. 이런 아이러니는 그의 삶과 작중 인물에도 반영된다. 열심히 사회 봉사와 계몽활동을 벌이는 여주인공는 화자인 예술가에 의해 비판적으로 평가된다. 이로써 체홉은 활동가 유형의 사람을 싫어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체홉 자신은 여주인공처럼 사회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하는 삶을 산다. 작품에서 대립되는 예술가의 관점과 활동가의 관점이 그의 실제 삶에서는 별 무리없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보편적인 관점에서 비극이라 할 만한 드라마를 ‘희극’이라고 못박아놓고, 그것을 희극으로 상연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한다. 바로 이런 아이러니와 자기 모순이 내가 발견한 그의 수수께끼요 그의 매력이다. 그에게 있어서 삶의 속성은 무질서, 엔트로피이고, 질서와 조화와 변화와 진보는 삶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동하고 인내하는’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 내적인 혼돈과 위기를 겪는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사랑은 좌절되어 상처와 고독과 우수로 귀결되고, 노동과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도 역시 현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이런 상황에서 ‘깨어있는’ 인물들, 특히 체홉의 분신 역할을 하는 의사들은 ‘멜랑콜리’를 공통의 정서로 안고 있다. 이 정서는 자만에 빠져 현실의 공허함과 비속함을 보고 듣지 못하는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낯설다. 반면에, 노동을 통해 행복한 미래를 이루려고 하다가 현실에 부닥쳐 쓰라린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익숙하다. 체홉의 작품 세계의 주요 정서인 멜랑콜리는 유쾌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유머와 인상주의적이고 서정적인 자연 묘사로 순화된다. 멜랑콜리를 감싸안는 유쾌한 유머, 날카로운 인식을 포용하는 따스한 공감의 시선 때문에 한 비평가는 체홉의 문학을 ‘따뜻한 마음과 차가운 눈’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지금 삶에서 체홉의 정서를 체험하고 있다면, 그처럼 ‘따뜻한 마음, 차가운 눈’을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우리도 그가 지향한 삶의 방식, 즉 ‘자기 자신의 삶을 살 것, 용감하게 도전할 것, 모든 환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고 포용할 것, 희망을 갖고 노동하고 인내할 것’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지 않을까. 엔트로피에 역행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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