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오끼나와를 아는가.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넓게 펼쳐진 산호섬을 상상하고 있진 않는가.본 기자는 그랬다.오끼나와 학생캠프에 참가하며 처음 든 생각은 하얀 백사장 위에 뛰어노는 한 명의 자유인이었다.하지만 알고 보니 캠프는 한일교류와 평화 .인권을 위한 학생캠프였다.빡빡하게 짜여진 답사와 강의 일정은 자연경관보단 오끼나와의 현실에 직면하게 했다.

오끼나와를 아는가.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넓게 펼쳐진 산호섬을 상상하고 있진 않는가. 본 기자는 그랬다. 오끼나와 학생캠프에 참가하며 처음 든 생각은 하얀 백사장 위에 뛰어노는 한 명의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캠프는 한일교류와 평화 ? 인권을 위한 학생캠프였다. 빡빡하게 짜여진 답사와 강의 일정은 자연경관보단 오끼나와의 현실에 직면하게 했다. 오끼나와, 일본의 유일한 전장지 오끼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일어났던 곳이지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은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진행됐다. 오끼나와의 일본군은 미국군 전력의 1/10에 불과했지만 일본은 오끼나와에서 전쟁을 감행했다. 가장 큰 이유는 본토에서의 피해를 막고, 특히 천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미군의 발목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해야만 하는 ‘국가’를 위한 일종의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사실 오끼나와가 일본 본토와 연관을 맺게 된 건 1879년 일본의 작은 현으로 통합 되면서다. 그 이전엔 독립된 ‘류큐 왕국’의 형태였다. 당시 주민들은 대부분 통합에 반대했지만 강제적으로 통합이 진행됐다. 오끼나와가 일본 본토에 종속되는 계기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시작된다. 일본의 시대란 생각이 퍼지면서 오끼나와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일본 본토를 따라가려는 흐름이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창씨개명과 같이 오끼나와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려 하거나 방언을 금지하는 흐름이 늘었다. 일본의 국가적 황민화 교육이 시작된 것도 이 때다. 집단주의가 이끈 집단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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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대에 의한 황민화 교육과 미군에 대한 철저한 사전선전은 오끼나와 주민들을 집단 자살로 이끌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일반 주민 140명이 치비치리 가마(일본어로서 ‘동굴’을 뜻한다)에서 은신했다. 미군은 가마에 군대가 은신하는 줄 알고 조사를 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생각을 대변하는 군관계자들에 의해 미군이 가축과 같은 귀신이라고 교육받았던 오끼나와 주민들은 4월 2일 집단 자결을 감행했고 82명이 희생당했다. 오끼나와 주민인 쇼우이치 씨는 이 사건에 대해 “이 사건은 자결이 아닌 살해라고 생각한다”며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은 생후 3개월이 된 아기도 희생된 걸 보면 이건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결이 아닌 국가 중심적 사고로 인해 살해당했다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점은 집단 자결이 있던 지역과 없던 지역의 차이점은 일본군과 주민이 함께 살고 있었느냐 아니느냐로 갈린다는 것이다. 오끼나와섬 주위의 도카시키 섬에선 329명이 일본군의 명령에 의해 집단 자살을 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시무쿠 가마에선 집단자살의 위협 속에서도 집단자살을 시행하지 않은 채 전원이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하와이에서 이민을 다녀온 할아버지들의 미국에 대한 설명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군사 정권의 강제적인 교육과 억압이 일반 주민들의 사고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잘 보여준다. 군대는 국민을 지키지 못했다 캠프 진행 중에 만난 오끼나와 주민들이 입을 모아 한 말이 “군대는 주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오끼나와 전쟁에서 군대는 오끼나와 주민을 지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남아 있는 부상자들을 기밀 누설의 위험이 있다고 해 살해하고 후퇴하기도 했다. 아쁘찌라 가마 사건 역시 비슷하다. 아쁘찌라라는 종유동굴은 육군 병원의 분원으로 근처주민의 피난처로 이용됐다. 가마 안은 치료실, 식량저장소, 주민들이 있던 곳, 시체 안치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민들이 있던 곳은 바로 입구 밑이다. 주민들은 안전하게 숨어 있지 못했다. 이들은 일본 병사들의 협박으로 가마 입구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미군들의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가마 견학 중 동굴 안에서 잠시 손전등을 끄고 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눈은 어둠에 적응되지 않았고 절망적인 암흑만이 존재했다. 오직 보이는 것이란 단 하나, 빛이 들어오던 입구뿐이었다. 하지만 그 입구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리는 또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대학 강의실의 헬리콥터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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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끼나와는 모든 전쟁의 짐을 얹고 있어야만 했다. 오끼나와는 일본 영토 중 0.6%만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현 일본 전체 미군기지 중 75%가 오끼나와에 위치해 있는 상태다. 따라서 군용 기지에 의한 피해 상황도 상당히 많다. 2004년 8월 13일 미해병대 소속의 기지에서 운송 및 공격용 헬리콥터가 오끼나와 대학교에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다행히 방학이어서 없었지만 17톤의 헬리콥터 추락으로 인해 대학 건물의 유리가 깨지고 건물의 콘크리트가 벗겨지는 피해를 입었다. 이 기지에서 대부분의 헬리콥터가 이라크 전쟁에 차출되었다. 특히 오끼나와 대학에 추락했던 헬리콥터는 CH53D 기종으로서 이라크에 추락했던 것과 동일하다. 오끼나와 대학의 한 교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전쟁 예행연습은 단순한 연습이 아닌 언제가 있을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라며 ‘전쟁 연습’이란 명목 하에 진행되는 미군 기지에 대해 비판했다. 이 기지는 일반 주민이 사는 지역과 많이 밀접해 있어 ‘미국 국방장관 럼스펠드도 위험하다고 했던 기지’라고 지적되기도 했었다. “헤노코의 듀공을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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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노코 지역은 미군 기지가 이전되는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미군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미군 기지가 바다를 메우고 이전할 것으로 계획되면서 생태계 보호를 위한 환경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이 환경운동에선 희귀종으로 분류되는 ‘듀공’이란 포유류의 멸종 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듀공은 스티커, 티셔츠, 열쇠고리 등에 새겨지는 캐릭터로도 활약 중이다. 헤노코 지역의 주민들은 현재 306일 째 연좌농성 중이다. 이들은 “군사 기지는 평화를 위한 기지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농성도 비폭력을 기본으로 한다. 운동을 하던 한 헤코노 주민은 “이 지역에서 ‘힘내세요, 열심히 하세요’란 말은 금기다”라며 “이 운동은 운동하는 사람들 것만이 아니라 ‘같이 하자’는 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전 운동 미군 반대 운동은 예술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긴죠 미노루씨는 대표적인 반전 예술가다.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가마 사건을 비롯한 반전 운동 탄압 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전쟁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과거의 전쟁을 긍정하는 조류를 단호히 거부한다. 특히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 “전쟁 전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종교라는 옷을 입고 퍼뜨리고 있다”며 비판한다. 경제적인 종속과 반전지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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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끼나와의 반전 운동이 전원의 의견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끼나와의 경제가 기지 사업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주들은 기지 철수에 대해 많은 반감을 갖고 있다. 미군에 땅을 빌려줌으로써 얻는 수입이 크기 때문이다. 미군 기지 주변의 업소나 기지 안에서 용역을 하는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에서 오끼나와에 지원을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 군기지에 사용되며 지역 주민을 위해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 와중에서도 미군 기지 반대를 위한 ‘반전 지주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기의 토지를 점유하는 미군기지에 대해 사용 거부를 주장했다. 미군은 토지사용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강압적으로 토지 점유를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반전지주들이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오끼나와 ≒ 한국’인 미군기지의 피해 이런 오끼나와의 현실은 한국 현실과 많이 겹친다. 현재 원주에서는 미군 기지 철폐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미군 기지가 원주 시내 근처에 위치해 있어 시민들이 많은 불편을 안고 있다. 비록 축소 계획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핵심적인 기지는 이전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미선, 효순이 사건이 일어났던 동두천 지역 역시 비슷하다. 인명 피해뿐만이 아니라 탱크가 마을로 지나가면서 가축들이 집단 폐사하는 사건도 일어난다. 오끼나와의 미군 기지 지역도 이런 피해를 당하고 있다. 오끼나와 대학의 마나미씨는 “헬리콥터 추락사건 때 부품이 집으로 들어왔을 뿐만이 아니라 기지의 소음 때문에 귀가 아프고 신생아의 체중 차이도 난다”고 말했다. 역시 오끼나와의 학생인 류타 씨는 “소음 때문에 선생님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공부할 때 비행기가 언제 떨어지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며 피해를 호소했다. 여성 문제도 한국의 현실처럼 많이 존재한다. 1995년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미군에게 강간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외에도 미군에 의한 강간 사건이 많이 있다고 한다. 오끼나와의 여성은 전쟁이 일어나면서 가장 소외 받는 집단이 됐다. 이런 여성의 모습은 오끼나와 문학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남성 권력에 눌리는 여성이기 때문에, 오끼나와가 농촌이며 일본의 지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해당자이기 때문에 항상 피해자로 존재한다. 나는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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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의 반전 운동은 지금까지 진행 되어 왔고 앞으로도 진행될 것이다. 일부에선 지금까지 성과가 별로 없어 앞으로도 비전이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이 있으며 오끼나와가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는 만큼 점점 기지 철수 여론이 줄어들고 있단 지적도 있다. 하지만 “군사 기지는 평화를 위한 기지가 아니다”라는 헤노코 지역의 한 운동가의 지적은 날카롭게 마음에 와 닿는다. 미선, 효순 사건은 미군 기지가 개인의 평화가 아닌 집단의 평화라는 명목만을 강조하고 있단 것을 잘 증명해준다. 오끼나와 대학의 한 학생은 “오끼나와의 미군 기지에 대해 모르는 것 자체가 오끼나와에 대한 차별”이라고 말한다. 비행기에서 본 오끼나와의 전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하지만 속은 모르고 오끼나와에 대한 이미지만을 좋아하던 나 역시 이 때까진 한 명의 가해자일 뿐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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