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는 〈오귀스트 로댕 – 위대한 손〉이라는 국내 최대규모의 로댕 전시회가 열렸다. 9,000원의 적지 않은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로댕’이라는 이름은 관람객들을 발길을 끊이지 않게 했으며, 장장 3달에 걸친 전시회가 마무리되었을 때는 미술계의 ‘해리포터’ 로 불리울 만큼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같은 기간, 로댕 전시실 바로 옆에 터를 잡은 〈팝아트〉전과 〈조각이란 무엇인가〉전은 전시기간 내내 한산한 모습이었다. 전시 장소는 거의 동일했지만, 오히려 하나의 블록버스터 전시회가 다른 전시장으로 향하는 관객의 발걸음마저 붙잡아버린 것이다. ‘이름값’ 하는 전시 “〈팝아트〉전을 한다는 것을 듣고 왔거든요. 그런데 와보니까 로댕전이 바로 옆 전시실에서 하고 있더라구요. 이번 아니면 볼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서 4,000원 더 주고 로댕전을 보고 나오는 길입니다. 아무래도 유명한 사람이고, 아이도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방학이라 아이와 함께 들렀다는 김미진(29, 주부)씨의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전시의 규모차이와 로댕의 유명세만으로 돌리기에는 매끄럽게 설명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왜 우리에게 ‘유명한’ 작가는 로댕이어야만 하는가’라는 것이다. “몇몇의 천재에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대중의 취향이 지배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우리가 존경하는 예술가들은 그만큼의 평가를 받을 자격을 갖고 있겠죠. 하지만 미술관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극히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서민석씨는 일부 중견작가나 이름있는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전시회가 이루어지는 현 상황을 이렇게 진단하면서, 전시 기획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렇다면 일반 관람객들의 〈로댕〉전에 대한 만족도는 어느 정도일까. 전시회를 둘러보고 나오는 관람객들의 반응은 대부분이 ‘책에서 본 것을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어 좋았다”평소에 해설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가 않아서 편하게 둘러보았다’ 는 것이었다. 이런 반응은 2002년 12월 14일부터 2003년 3월 3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을 내건〈밀레의 여정〉전에서도 비슷했다. 새로운 것이 좋아! 그러나 요즈음의 추세를 살펴보면 익숙한 것을 추구하는 대중의 취향이란 것이 오히려 허구처럼 느껴진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양식을 들여다보면, ‘빠르다’ ‘새롭다’ ‘변화한다’등의 시간적인 개념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새로움’ 자체가 하나의 조형양식이 되어버린 요즘, 새로운 것을 위해서라면 온갖 잡다한 요소들을 끌어들여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하는 기업들의 노력은 끊이질 않는다. 80년대 말의 현란한 디스코 열풍과 21C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에 대한 환상은 한 권의 잡지 속에 실린 광고 이미지들에서 어지럽게 뒤섞인 상태로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조형양식을 규정하는 것은 ‘자본’이며 문화 생산의 주체는 기업”이라는 아도르노의 말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예술가들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스러졌다고는 하지만, 오늘날 일반적인 대중 문화와 예술가의 이상은 완전히 괴리된 것처럼 보인다. 미술이나 전시회는 하나의 지식처럼, 책에서 보았던 하나의 양식처럼 감정을 습득하는 공간이 되었다. 전시회를 찾는 관람객들이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시회가 감동을 ‘재발견’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작품이 가졌던 ‘아우라’는 이전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전이되었지만, 미술은 여전히 어려운 공식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것은 더 이상 이전의 양식을 뛰어넘는 하나의 예술적 성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술이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고 그것은 예측하지 못한 감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각이란 무엇인가〉를 기획했던 사람의 말이다. 물론 로댕이 표현했던 그의 고민과 작품이 오늘날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 좀 더 밀착된, 바로 우리 시대의 고민들은〈조각이란 무엇인가〉전에서 많은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새로운 소통방식에의 고민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남는다. 천재, 천재론 그리고 바람직한 ‘양식’ 그렇다고 마냥 대중들의 몰이해를 비난하며 새로운 조형양식을 고민하기엔 또 다른 난관이 버티고 있다. 근대 이전의 예술이 전시대의 조형양식을 이해해야만 느낄 수 있는 확고하고 놀라운 변화를 추구했다면, 오늘날은 이제까지 등장했던 모든 양식이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 동등한 평가선상에서 많은 예술가들은 이미 죽어버린 ‘이름있는’ 천재들과 대결해야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애초부터 공정할 수가 없는 게임이다. 푸코는 이렇게 정의했다. “예술사는 한 줌도 안되는 인물들에 영광을 부여하고, 나머지 예술가들은 내동댕이친 ‘권력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얼마전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가 펴낸,「천재는 죽었다」(아트북스,2003)도 같은 맥락에서 예술사에 숨어있는 천재, 천재론 자체가 가짜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이 ‘천재의 실상과 허상에 관한 임상보고서’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서문을 열고 있다. “현대미술, 넓게는 현대문화라는 기적적으로 질서를 유지해나가는 체계의 배후를 차분하게 독해해내는 일이다. 그 각각의 구성요인들에 관여하고, 소통의 경로들을 점령하고 있는 가히 ‘천재적인’ 체계의 진실들을 직시하는 일이다. 끝으로 이 글이 천재 숭배의 오랜 관습에 얽힌 과거와 현재의 거짓들을 목격하고, 특히 ‘천재성’을 고사시키는 현대적 조건들, 대중적이고 세속적이며 시장적인 체계의 진실들을 밝히는데 유효한 단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천재는 죽었다”라는 명제속에는 천재의 개념 자체가 신화며 허구라는 것과, 현대가 천재의 생존조건으로서 매우 부적절하다는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천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푸념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천재성을 지닌 사람은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지만 그들 모두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더군다나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들의 천재성이 드러나기 위한 조건은 오히려 더 열악해졌다. 중세 시대 예술을 재단했던 ‘신’의 개념은 오늘날의 매스미디어에게 그 권력을 양도했으며, 현재에는 예술뿐만 아니라 개인의 취향조차도 재구성되고 있다. 이전 시대에 구축되었던 견고한 예술양식들 못지않게 매스미디어는 대중들의 선호를 토대로 바람직한 양식을 규격화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양식에 대한 실험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때로는 배척당하기까지 한다. 설사 그 실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스타일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유행’이 하나의 양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인 소통매체, 다양한 미디어의 개발 새로운 양식과 천재적인 예술가에 대한 환상을 넘어선 다음에야 미술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가능하다. 서민석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개인적인 소통매체를 개발하고,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어휘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더욱 좋겠지요.” 단지 좋음과 싫음으로 어떤 작품을 평가해왔다면, 또 그 평가의 기준이 외부의 것이었다면 자신만의 언어로 그것을 치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새로운 시도를 체험하기 위해서 5월 18일까지 ‘로댕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재미조각가 존 배(66, 프랫 인스티튜트 명예교수) 의 철사 조각작품들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에게 로댕을 뛰어넘는 명성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 작품들 중에서 내가 인정하고 나의 고민과 일치하는 예술 양식을 발견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