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교육학자 얼 쇼리스는 1995년부터 뉴욕에서 노숙인과 마약중독자 등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건물 이름을 따 ‘클레멘트 코스’로 불린 이 강좌에 참여한 31명 가운데 17명이 강의를 마쳤고, 1명을 뺀 전원이 일자리를 얻거나 대학에 입학했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성찰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줘, 사회에 다시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는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가 얼 쇼리스의 을 번역한 것을 계기로 ‘클레멘트 코스’가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고립된 노숙인들에게 관계망을 제공하는 성프란시스대학 성프란시스대학은 2005년 9월에 만들어졌다. 성공회 다시서기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이 인문학 교육 과정은 노숙인을 대상으로 하며 1기 13명, 2기 11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현재 3기가 진행 중이다. 성프란시스대학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김자옥 씨는 학생을 모집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당장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에 오긴 했는데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직장이 얻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금방 그만두시는 분들도 많아요. 특히 노숙인들은 심적으로 상처를 많이 받으신 분들이라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죠.” 학기 중에 결석이 많을 뿐만 아니라, 서로간의 오해를 쉽게 풀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수업 시간에 공지영의 을 읽고 사형제 폐지에 대해 토론을 했어요. 찬반으로 맞섰던 두 분이 급기야는 주먹다짐을 하시더라구요.”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의 8~90퍼센트가 이런 내부적 갈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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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시스 대학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자옥 사회복지사. |
성프란시스대학에서는 매 학기 철학, 문학, 글쓰기 등의 수업을 마련하고 있다. 철학 강의의 경우 철학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유, 행복 등에 대한 평소 생각을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는 최준영 교수는 학생들에게 을 반드시 읽힌다고 한다. 전태일과 같은 시대에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 온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동적이라는 반응도 있고, 전태일 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도 기억해야 하지 않느냐는 진지한 논의도 나와요. 어떤 분은 너무 답답해서 읽기 싫으니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달라고도 하고, 운동권 학생들이 읽는 책을 우리가 왜 읽어야 하냐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최 교수는 학생들의 다양한 반응을 반긴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계화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교실에서만큼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거죠.” 2기 학생들의 경우 자발적으로 독서 모임도 결성했다. 인문학 수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학생들 사이에 형성된 관계망이다.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우리’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올해 초 한 수강생의 장례식에 1, 2, 3기 수강생들이 모두 모여 추모를 하기도 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이 사람들은 각자가 ‘섬’이었거든요. 옆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 않던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 없었다면 이런 관계는 형성되기 어려웠겠죠.” 김자옥 복지사는 인문학을 통해 타인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하나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수강생 한 명은 가족에게 돌아갔으며 상당수의 노숙인들이 거리 생활을 청산했다. 경제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단단하게 격려하는 일,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힘이다. W-ing 인문학 코스,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들의 삶을 위하여“인문학 코스라는 이름을 붙이진 않았지만, 유사한 교육들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2006년 1월에 ‘클레멘트 코스’를 알게 되면서 저희 프로그램들을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찾은 셈이죠.” 여성성공센터 W-ing에서는 2006년 4월부터 ‘인문학 코스’라는 제목 하에 한 때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들을 대상으로 철학 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여성학, 문학, 글쓰기, 역사 등의 교과목이 추가됐다. W-ing의 인문학 코스에서는 여성들의 주도성 향상을 핵심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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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을 통해 여성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자는 여성성공센터 W-ing. |
W-ing이 다른 인문학 기관과 차별성을 보이는 점은 ‘여성주의’이다. 여성으로서 억압적인 경험을 유난히 많이 겪은 학생들이 자기 삶 속에서 여성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 시간에 다같이 ‘아테네 학당’을 보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찾아봤어요. 그런데 여성학 시간에 그 그림을 새롭게 보게 되는 거죠. 저 뒷편에는 청소하고 밥을 하는 여성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인식들이 여성으로서의 주도성과 자존감을 고양시키는데 도움이 됐다고 봐요.” 여성학 강의를 들었던 용(가명) 씨는 수업을 듣기 전에는 몰랐던 여성의 시각을 새롭게 알게 되어서 좋았다며 “특히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례를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되어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소감을 밝혔다. 종강 즈음에는 워크샵 형태로 발표를 한다. 여성을 비하하고 있는 대중가요를 개사하여 부르기도 하고, 직접 를 무대에 올리면서 학생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된다. 인문학 코스의 결과를 계량화해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성성공센터 장영숙 기획국장은 인문학 수업을 통한 내적 치유와 사회적 관계의 확장을 중요한 변화로 꼽았다. “가정 폭력의 기억에 괴로워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런데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 가족에 대해 증오와 동시에 사랑받고 싶다는 양가적인 감정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여성학을 강의하시던 선생님과 너무 친해졌죠. 하나의 ‘멘토-멘티’ 관계가 형성된 거에요.” 재소자들에게 건네는 ‘희망의 인문학’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의는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관악인문대학, 노원 성프란시스대학, 수원인문대학, 제주희망대학 등에서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올해부터는 의정부교도소에서 법무부와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주관 하에 재소자를 대상으로 인문학 시범 교육이 시행됐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최철규 간사는 “현대 교정의 핵심은 재사회화다. 교도소의 물리적 환경은 나아졌는데 교정 프로그램이 넉넉지 않다”며 운영 취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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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 교도소에서 열린 재소자 교육 현장의 엄숙한 분위기. |
전국에서 선발돼 의정부 교도소에 모인 영어반, 일어반 학생들의 자습시간을 빌려 철학 및 문학 강의를 운영했는데 시범 운영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강의실이나 기자재도 열악했고, 인문학 수업을 들은 후에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도 구비돼 있지 않았다. 재소자 교육 특유의 경직성도 문제로 꼽힌다. 교도관이 항상 참관을 하기 때문에 재소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최 간사는 재소자들의 인문학에 대한 호기심이나 의욕어린 모습은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수업 중에 보여주는 집중력이 놀라울 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준법의식, 도덕 등을 가르치는 기존의 교정 교육이 ‘잘못에 대한 반성’을 강조하는 반면, 인문학 교육은 기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마련한다. 재범의 악순환을 방지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서울대 ‘인문학회’에서도 가을학기부터 2주 또는 한 달에 한 번씩 저소득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클레멘트 코스를 운영할 계획이다. 강의는 서울대 강의실을 빌려 이뤄지고 중·고교생들은 관악구청이나 관내 사회복지 시설에서 20명 정도 추천을 받을 예정이다. 수업은 문학·역사·철학에 대한 강의는 물론, 사회 문제에 대한 토론이나 문예 창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를 위한 제언몇몇 모범적인 사례도 있지만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요원하다. 성프란시스대학, 관악인문대학 등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최준영 씨는 클레멘트 코스에 참여하는 강사들의 태도에 쓴 소리를 던졌다. “강의에 참여하는 교수들의 사전 준비가 필요해요. 계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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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준영 씨는 ‘강사들의 적극적인 관계 형성 의지’를 강조했다. |
수법을 고안할 필요가 있죠.” 강사의 설명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학생들이 이해를 못하는 경우도 있고, 어려운 철학 교과서를 그냥 강독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강사들이 학생들과의 인간관계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기계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실제적인 소통을 통해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정신의 노숙’을 방지하는 거죠.”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하고도 학생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교수도 있었다. 어떤 여교수는 노숙인들이 폭력을 휘두를까봐 두려워 남편을 강의에 대동하기도 했다. “강의를 통해 누군가의 삶에 개입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강사들이 보다 책임성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여성성공센터의 장영숙 기획국장은 파편화된 현재의 소외계층 인문학 코스 간에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각 기관별로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면서도 전체적인 운영 방향에 대한 적극적인 교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클레멘트 코스를 수강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 학점이 인정됐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우리만의 인문학 코스로 운영되기 보다는 학점 인정 등을 통해 사회로 조금 더 확장됐으면 합니다. 당장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는 없지만, 취업 후에 야간 대학이라도 다니고 싶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클레멘트 코스의 지속성이다. 관악인문대학에서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응석 씨는 “최근 각종 언론, 단체 등에서 인문학 과정에 대해 문의해오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분위기가 자칫 한 순간의 유행으로 전락하다가 사장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인문학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다. 인문학은 모든 인간의 존재바탕이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클레멘트 코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