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1일 서울대가 농활을 포함한 사회봉사활동을 학점으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총학생회 홈페이지 게시판은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으로 잠시 달아올랐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학점화가 가져올 긍정적/부정적 효과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농활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농활을 ‘농민학생연대활동’으로 볼 것인지, ‘봉사활동’으로 볼 것인지, 혹은 ‘현장학습’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학점화가 농활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번 조치는 현재 학생사회의 농활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고수되어 왔던 ‘농민학생연대활동’으로서의 농활 개념은 다시 한번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연대’라는 개념을 둘러싼 논쟁은 꽤나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농활에 대한 정체성 규정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 구성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문제로 다루어졌을 만큼 ‘연대’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따라서 ‘연대’가 무엇이며, 농활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농활의 이해에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연대’,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기 ‘연대’의 이해는 농활의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에 해당한다고 앞서 강조했지만, 그 중요하다는 ‘연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연대’라는 단어는, 그 개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 없이, 단지 막연하게 이미지화된 형태로 소통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애매모호하다. 실제로, 농활은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조차도 그 ‘연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는 못한다. 이것은 ‘농민학생연대활동’에서의 ‘연대’가 역사적으로 사회화된 단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농민학생연대활동’이 30여년 동안 지속되면서, 그 구체적인 양태가 끊임없이 변화했던 만큼, ‘연대’의 의미 자체에도 꾸준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대’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치 수학적 공리와도 같은 엄밀성에 기초한 정의를 새로이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간 농활의 모습을 훑어보며 ‘농민학생연대활동’에 대한 이미지화의 과정이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보는 것일 터이다. 농활이 시작된 시기는 1970년대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1930년대의 브나로드 운동, 1960년대의 향토개척단 운동 등의 ‘농촌에서의 활동’은 존재했으나, 이것을 지금의 농활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파악하기는 어렵다. ‘연대’를 중시하는, 적어도 중시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강박f을 짊어지고 있는 현재의 ‘농민학생연대활동’과는 달리, 1970년대 이전의 ‘농촌에서의 활동’들은 낭만적이고 시혜적인 성격을 띤 사회봉사활동으로 사고되는 경향이 강했다. 농활의 역사는 한국학생운동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농활이 시작된 70년대는 군부정권에 의한 파쇼적 억압이 전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였고, 그랬던 만큼 한국사회를 어떻게 변혁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과학적 논의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학생운동진영의 논의에 따르면, 남한 인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사회적 억압과 착취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집단인 농민들은 이른바 ‘혁명의 3대 주력군’ 중 하나였다. 그런데 당시 농민들은 ‘혁명의 주력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는 하나, 새마을 운동 등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눈이 가려져,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당시 학생운동진영의 현실인식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필요했던 것은, 시대의 모순에 먼저 눈뜬 학생들이 농민들을 계몽하여 농민운동을 활성화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기제로서 채택된 것이 농활이었다. 농민운동의 주체를 ‘발굴’하고 ‘조직’하는 것이 농활의 목표였으므로, ‘일손돕기’보다는 분반활동이나 호별방문과 같은 농민들과의 대화가 훨씬 더 중시되었다. 요컨대, 이 시기의 농활은 농업이라는 특정 부문에 국한된 관심에 기인한 활동이라기보다는, 총체적 사회변혁이라는 운동 ‘전략’ 아래 배치된 ‘전술’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70년대 농활의 모습은 80년대 들어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80년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기점으로 광범위한 세력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학생운동진영은, 83년의 ‘유화조치’ 이후 학생회 체계를 부활시키며 운동의 ‘대중화’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와 발맞추어 농활도 바뀌게 된다. 이전에는 소수의 전위적 운동가들이 소규모 팀 단위로 움직이던 활동이었던 농활이 정기적인 학생회 사업으로 자리잡으면서, 이전보다 많은 학생들이 참가하는 활동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87년에는「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93년에는「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출범하면서 가속화된다. 이 두 전국 조직 간의 연대사업으로서 농활이 위치하게 되면서, 전국에서 통일적이고 조직적인 농활이 이루어진 결과, 농활은 한때 연인원이 6~7만에 이르는, ‘대학생이라면 한번쯤 가 볼만한’ 대중적인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농활의 대중화는, 농활의 성격 자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의 농활이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주요 목표로 두었다면, 80년대 이후의 농활은 그것과 더불어 참여하는 대학생들에 대한 재사회화라는 기능에도 착목한다. 쉽게 말해, 사회적 억압에 고통받는 농민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모순을 깨닫고 ‘의식화’하는 수단으로서의 농활의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들이 ‘농민학생연대활동’에서의 ‘연대’라는 단어 안에 뭉뚱그려져 있다. 이후 십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농활의 모습에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지만, 이러한 ‘연대’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농활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활, 과연 연대활동인가 농활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이 초점을 맞추는 지점은 앞서 서술한 문제의식을 현재의 농활이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활이 원래의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는 의의를 떠나, 봉사활동화하고 있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농활을 주체적으로 준비했던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고민해 봤을 법한 농활의 ’관성화’라는 문제가 등장한지도 이미 10년이 되어가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마련한 사례를 만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많은 경우, 그 ‘해결책’이란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의 공허한 처방을 좀 더 세련된 문장으로 다듬어 내놓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에 그쳤다. 그 결과는 농활의 지속적인 축소재생산으로 나타났다. 농활대원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농활대 자료집에 제시되는 문제점들은 해가 바뀌어도 매번 그대로이며, 평가의 자리에선 “농민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못한 것 같다.”, “작업에만 매몰되는 경향을 보였다.”,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부족했다.” 등등의 ‘뻔한’ 이야기가 되풀이된다. 올해 인문대 농활대장을 맡았던 정화 씨(국문 01)는 “농활 자체의 상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각 마을 농활대들이 농활 기조에 대해 얼마나 풀어냈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한국 사회구조 변화에 대한 거시적인 분석이 종종 동원된다. 이러한 분석에서는 농활이 제기되었던 70년대 이후, 한국사회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산업구조와 사회구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게 된 결과, 농촌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위상이 변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농민이 한국 사회의 가장 많은 인구를 점하던 70년대와는 달리, 현재의 농민은 한국 인구의 10%에도 채 못 미치는 소수집단이며, 주로 노년층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에서도 토지소유농민 / 농업임노동자와 같은 계급적 분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농민에게 이른바 ‘혁명의 주력군’이나 ‘변혁의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된다. 이러한 분석은 현실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실제로, 농활에 가본 사람들 대부분이 느끼는 점 중에 하나가, 농활을 ‘연대활동’이라고 여기는 농민들 자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농활대가 그저 일 도와주러 온 착한 학생들로 인식되는 마을 분위기에서 농민운동 강화를 위한 실천을 벌여내기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며, 실제로도 농활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인 농민회원 조직에 있어 농활대가 성과를 남겼다는 사례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농활에 대한 주관적 관념과 그 객관적 실재는 일치하지 않았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은, 새로운 현장활동이라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며 이 양자 사이의 간극 좁히기를 기획했다. 이러한 학생사회 내 노력들을 후속 기사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