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무렵 한참 ‘서울대 폐지론’으로 여론이 뜨겁게 달궈진 적이 있었다. 과거에도 이따금 비슷한 주장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17대 총선 때 민주노동당이 ‘서울대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내놓으면서 서울대 폐지론은 급속도로 공론화됐다. 당시 민주노동당 총선공약개발팀에서 교육 분야를 담당했던 정진상(경상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교육 문제의 핵심 원인인 대학서열체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울대는 폐지돼야 한다”며 “국립대의 한 해 입학생인 7만 4천 명을 전국 국공립대 통합전형으로 모집하고 졸업 시에는 동일한 ‘국립대학 학위’를 수여하면 된다”고 밝혔다. 또한 사립대학에 대해서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국공립대로의 전환을 유도한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것이 바로 ‘국립대 통합네트워크론’이다.‘서울대 폐지론’ 둘러싸고 갑론을박 이어져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차지해 원내 제3당으로 국회에 입성한 이후 서울대 폐지론을 둘러싼 논의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여론은 ‘서울대 폐지론’을 두고 찬반양론으로 확연히 갈렸다. 서울대학교 대학 본부와 재학생, 졸업생을 비롯한 학교 구성원들 대부분은 ‘서울대가 폐지된다고 해도 학벌을 중시하는 풍토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논리로 서울대 폐지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비롯한 교육계 진보진영과 ‘학벌 없는 사회’ 등의 시민사회단체들은 서울대가 학벌 문제의 정점에 있다고 지적하며, ‘서울대 폐지’는 단순히 서울대를 없애자는 게 아니라 국립대 평준화를 통해 교육의 공공성을 증진시키고 교육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대 폐지론을 놓고 들끓었던 여론은 얼마 못 가 식어 버렸다. 서울대 폐지론을 주장한 민주노동당이 원내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한 소수정당이라는 한계가 있었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부재했던 까닭에 정책의 입법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화돼 버린 상아탑을 해체해 진정으로 ‘학문 하는’ 대학을 만들고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경쟁하는 개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학벌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꾸준히 지적돼 왔다. ‘학벌없는사회만들기’에서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김동훈(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준신분적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개인이 다양한 능력을 최대로 발현하는 데 있어 암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며 학벌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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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서부터 ‘학벌없는사회만들기’의 상임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동훈 교수(국민대 법학과)와 17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총선공약개발팀에서 교육 분야를 담당했던 정진상 교수(경상대 사회학과). |
학벌주의 극복 위한 정부 대책도 발표돼
학벌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은 그동안 부재하다시피 하다가 참여정부 출범 이후 관련된 논의가 본격화됐다. 이는 우리 사회에 출신학교에 따른 차별이 심각하며(87.7%), 취업, 승진, 결혼 등에서 차별을 당하는 경험도 상당하며(31.9%), 학벌이 출세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61.0%)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국정홍보처의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가 시발점이 됐다. 정부는 사교육비 규모가 GDP의 10%에 육박하면서도 정장 대학의 경쟁력은 바닥을 맴도는 현실에 문제가 있다며, 학벌의 세습화로 인한 계층간 불평등 의식의 심화를 극복하고 고등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대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2004년 4월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에서는 관계부처의 협의를 거쳐 ‘사회계층간 통합과 능력중심사회 구현을 위한 학벌주의 극복 종합 대책’이라는 후속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차별금지법안에 ‘학벌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도 추가됐으며 특히 2005년도부터는 5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서 지방 소재 대학교 출신자를 최소한 20% 이상 합격시키는 지방인재 채용목표제가 도입됐다. 이는 지방 소재 대학 출신 비율이 20%에 못 미치면 부족 인원을 추가합격 시키는 제도로, 역차별의 소지도 보완한 성공한 입법안이었다. 또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지원하기 위한 특성화고 육성방안이 발표됐고, 학벌주의 의식개혁 캠페인도 범정부차원에서 진행됐다. 기업과 사회단체 등의 민간부문에 학벌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도록 권고하는 정책지도도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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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부가 학벌주의 극복을 위한 범정부적 대책의 일환으로 발표한 보고서 ‘학벌주의 극복 종합대책’ |
‘국립대 법인화’로 학벌주의 극복하자?
하지만 정책의 상당 부분이 권고와 캠페인 수준으로 기획됐기 때문에 많은 한계점이 노출됐다. 무엇보다도 대학의 구조개혁에 대한 대안이 미흡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교육부가 국립대학 운영방향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으로 내놓은 국립대간 교수·학생·학점 교류는 실적이 미미했을 뿐더러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낳았다.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하겠다던 ‘고등교육 평가 전담기구’는 관련 법안이 3년째 국회를 통과하지 못함에 따라 기관 출범도 하지 못한 상태다. 대학별로 특성화된 연구사업에 집중 투자하여 낙후된 대학의 연구환경을 끌어 올린다는 ‘BK21 사업’, 그리고 지방대학 육성 계획인 ‘누리사업’은 국가의 지원이 소위 ‘잘 나가는’ 몇몇 대학에만 집중되면서 대학간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국립대 특수법인화’ 정책을 추진해 국고 보조를 줄이고 대학 간의 경쟁을 유발시켜 학벌주의를 극복한다는 교육부의 대책에 대해서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넘어 정책 기조 자체가 잘못됐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철호(전교조 참교육연구소장) 씨는 정부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서인 ‘교육부의 대국민사기극’에서 ‘겉으로는 공교육정상화와 평등교육을 주장하지만 정책의 방향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며 ‘잘못된 정책기조로 인해 대학 서열체계는 공고해지고 학벌사회는 강화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학벌주의는 개인의 적성에 따른 능력 발휘를 제한해학벌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줄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어렵게 그것을 쟁취한 이들에게도 살아가는 내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작용해 삶을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가부장적인 사회 환경이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끊임없이 역할 수행을 강요해 압박을 가하듯이, 학벌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이미 ‘괜찮은’ 학벌을 획득한 이들에게 부담을 끊임없이 안겨 줌으로써 개인의 취향과 적성에 따른 능력 발휘를 제한할 여지가 크다. 학벌 쟁탈전에 최종적인 승자는 온데간데 없고 모두가 ‘패자’ 또는 ‘패자 아닌 패자’가 되는 것이다.폐쇄적인 학벌주의를 극복하고 최소한 누구에게나 능력에 따라 평가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열린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러한 모순점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제도적 장벽들을 해체하는 과감한 시도들이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 우리 사회에는 ‘미세한 균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민간기업들이 채용을 위한 이력서에 예전에는 필수적으로 기재 하던 학력란을 폐지해 가고 있는 추세 등의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한다.이제는 서울대가 학벌주의 극복을 위해 발벗고 나설 때하지만 제도의 변화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학벌과 같은 ‘간판’으로 인간을 상품화하고 단정짓기보다는 개인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높이 사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학벌주의에 대한 좀 더 활발한 공론장을 마련해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법대의 한 학생은 “‘서울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학벌사회의 문제점들은 서울대를 당장 폐지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다양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거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앞으로도 계속 서울대가 학벌주의의 정점에서 폐쇄적인 학벌사회를 확대재생산하는 ‘원흉’으로 지목된다면, 극단적인 처방으로 ‘서울대 학부제 폐지’ 또는 ‘국립대 평준화’ 논의가 여론의 지지를 업고 급물살을 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소한 그러한 극단적인 단계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는 서울대가 스스로 학벌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에 앞장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홍지영(사회대 07) 씨는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정점에 있는 서울대를 비롯한 몇몇 대학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서울대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켰다. 학벌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일차 관문을 통과하는 열쇠는 서울대에 쥐어져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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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정문이 폐쇄적인 학벌사회의 상징이라는 비판을 넘어, 세상과 소통하는 열린 통로로 인식되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