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사슬로도 묶을 수 없으리

여기 어떤 사람이 ‘머물고’ 있다.그는 항일투쟁을 했던 아버지의 공로로 항일혁명투사들의 유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인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그의 전도는 유망했다.동료들은 후에 북쪽에서 요직을 차지했다.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군에 남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우연히 남쪽으로 내려온다.그 후 북쪽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이 죄가 되어 감옥에서 34년, 출소해서 14년, 더해서 약 50년을 남쪽에서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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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어떤 사람이 ‘머물고’ 있다. 그는 항일투쟁을 했던 아버지의 공로로 항일혁명투사들의 유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인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 그의 전도는 유망했다. 동료들은 후에 북쪽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후 군에 남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우연히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 후 북쪽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이 죄가 되어 감옥에서 34년, 출소해서 14년, 더해서 약 50년을 남쪽에서 ‘머물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체념하고 남은 생을 정리할 즈음, 그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여기 머물 이유가 없으니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가 바로 비전향장기수 박종린 선생(75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그의 동료들의 목소리를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서울대저널』에서는 ‘이 시대가 낳은 이방인’ 박종린 선생의 삶과, 그가 많은 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봤다.“12년의 기다림이 나에게는 억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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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당 번호를 잊을 수가 없어요”

약속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기자들에게 박종린 선생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오느라 수고 많았다”며 반갑게 맞는다. 흉악한 외모에 뿔 달린 머리, 날카로운 손톱을 가졌다고 들었던 간첩이라기엔 박종린 선생은 마냥 인상 좋은 동네 할아버지 같다. 요즘 뭐하고 지내시냐는 질문에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평범했다. “요즘은 건강이 안 좋아요. 가끔씩 시내에 나가서 동네 노인들 만나서 얘기나하고 지내지. 다른 사람들이 일도 안 주고, 일을 줘도 부대껴서 못해요.” 기존에 갖고 있던 간첩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평범한 일상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미줄같이 그를 옭아매고 있는 ‘보안관찰’이란 족쇄를 찾아낼 수 있다. 감옥에서 출소한 1993년부터 그에게는 ‘보안관찰’이 시작됐다. “아마 죽기 전에는 (보안관찰이) 떨어지지 않을거에요. 출소하고 고향에 보내달라고 한 지가 벌써 12년째에요. 해당 부처에서는 보내주겠다고 하는데… 12년의 기다림이 내 입장에선 억류에요. 일절 외부로 못 나가고, 외지에 가려면 일일이 보고해야하고, 2개월에 한 번씩 행적을 보고하는 조사서를 써야 해요. 형식상의 자유만 보장되는 거죠.” 선생의 아버지는 항일유격대원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얼굴을 자주 볼 수는 없었다. 해방 직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는 항일혁명투사들의 유자녀들을 위한 학교인 ‘만경대혁명학원’을 다녔다. 당시 그는 김일성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항일투쟁시기에는 뵐 수가 없어요. 나오기 전에는 많이 뵀죠. 학원에도 자주 찾아오시고 바로 옆에서 볼 수도 있었어요. 한마디로 인자하시면서 호탕한 분이에요. 평생을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북에서 지금까지 생존해있는 사람치고 그 분을 존경하는 마음이 변하려야 변할 수가 없는 거죠.” 그는 감옥에서 몰래 라디오로 김 주석의 신년사를 들었던 그 때의 감동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선생이 김 주석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며 기자에게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김일성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한홍구 교수가 말했듯이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수령이었던 김일성을 인정하는 게 옳지 않을까.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치인 김일성의 공과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그래도 내 삶에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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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한다고 인간의 생각이 같아지는가? -영화 ‘선택’의 대사 중

한국전쟁 후 군에 남아있던 박 선생은 1959년 우연한 기회에 남파된다. 그는 체포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남쪽에서는 북진통일을 외쳤어요. 남쪽에서도 민족적 양심을 가진 조봉암 선생 같은 분들은 평화통일을 주장했죠. 그래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세력들끼리 통일 방법을 논의해보자고 접선하기 위해 비공개적으로 나온 분이 있는데, 사정상 제가 대신 나왔어요. 내려와서 임무를 마치고 위에서 올라오라는 명령만 기다리다가 체포되었죠. 그때 저와 만나지도 않았던 그 분의 친구들까지 사건에 개입시키면서 자유당 말기 정·부통령 선거 때 이용해먹었어요. 그 분의 친구들이 민주당 간부들이거나 국회의원이었거든요. 1심에선 사형을 받고, 확정판결을 기다리고 있는데 4 ·19가 일어난거에요. 진실이 밝혀지고 그 분들은 다 석방됐는데 저는 북에서 왔기 때문에 혼자 무기징역을 받았죠. 그분들이 정권으로 들어가서 저에게 미안하니까 저를 빼내서 북으로 보내려고 준비를 했어요. 그게 3개월 정도 걸렸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고 온 나라가 난리가 났어. 5·16이 일어난 거죠. ‘반공재정비’라고 해서 나를 보내주려고 했던 분들은 다 해외로 도망갔고 저만 고스란히 징역을 살았죠.”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감옥에서 4·19와 5·16을 거치며 현대사의 격동기를 보낸 박 선생은 이후 34년의 감옥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들 가운데 언제 선생은 가장 힘들었을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때 반발심이 생겨요. 지금은 반발심과 증오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말로 할 수가 없었죠. 국가 법률로 수용시켰으면 규칙에 맞게 대해야 되는데 우리들은 일반 재소자들보다 차별받고, 조금만 뭘 해도 수백 배 이상의 보복을 당해야 했으니까요. 또 배고픔의 고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처우가 열악했으니까 늘 배고팠죠. 그래서 영양실조도 걸리고 이빨도 빠지고, 폐병도 걸리는 거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70년대 이뤄졌던 강제전향으로 이어졌다. 선생에게는 악몽과 같은 기억일것이기에 기자도 어렵게 말문을 뗐다. “강제전향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그런데 무조건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지는 않았요. 이놈들도 서로 지내다 보면 사람들의 특성을 알게 되니까 다르게 하죠.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이면 말로 꾀고, 미인계를 쓰는 경우도 있었고, 정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다짜고짜 때리는 거지. 배우지 못하고 심지가 확고한 사람은 제일 강도 높게 당했어요. 그러다가 지네도 힘에 부쳐서 못하니까 흉악범들을 시킨거지.”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다룬 영화 ‘선택’이나 ‘송환’을 보면 선생들이 그동안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종린 선생은 영화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선택’을 보면서 ‘저건 고문도 아니다’라고 했어요. 실제 당한 우리들 얘기랑 거리가 있거든. (조금은 민주화된) 8·90년대 교도소를 배경으로 우리가 당했던 내용을 넣으려고 하니까 얘기가 안 되지. ‘송환’도 내가 봤을땐 너무나 감상적으로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 것 같아요. 그래도 후에 영화에 대한 반응은 좋았으니까 의미가 있었죠.” 모든 이에게 젊은 시절은 두려움없이 원하는 바를 이뤄나갈 수 있는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멀리 있는’ 당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34년 시절을 교도소에서 보내야만 했다. 선생은 잃어버린 청춘이 한번도 억울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데, 받을 때마다 ‘그랬던가?’ 생각해보면 한 번도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런 생각을 했다면 지금 사는 게 괴로웠겠지. 그런데 나는 지금 괴롭지 않거든요. 건강 때문에 남들처럼 활동하지 못할 때 약간 힘들지만. 아마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이 길을 택했을 겁니다.”“이런 취재가 필요없는 그 날이 어서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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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린 선생은 93년 출소 후 문익환 목사의 도움으로 그의 제자가 시무하는 전남 무안에 있는 교회 근처에서 살게 된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두려워하면서 피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선생도 외출할 때는 동네로 못 지나고, 돌아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녹아내렸다. “한 3개월 있으니까 사람들이 차츰 호기심을 갖고 안부도 물어보더니 6개월 되니까 모두들 친해졌어요. 목사님한테는 괴로울 건 없겠구나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지금도 동네 분들이 쌀이나 반찬을 보내주고 그래요.” 전남 무안에서 동네 분들과 즐거운 시절을 보냈던 박 선생이지만 남쪽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에게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고향은 이념을 떠나서 언젠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하지만 감히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은 못했다. 그래서 6·15 정상회담 직후 이뤄진 송환에서 제외됐을 때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빠졌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낙담했지요. 지금은 몇 년 더 살고 가자고, 더 좋은 부분을 얻어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북핵 사태 이후 급격히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다시금 화해 분위기로 변하면서 선생은 요즘 다시 ‘송환’을 기대한다. 선생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항상 꿈꾸면서도, 한편으론 남쪽에서 머무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한다. “통일 운동하는 청년들이 내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가 많아요. 그럴때마다 나도 같이 토론하면서 고민을 풀어나가자고 해요. 해결 못하는 건 숙제로 남기고. 그렇게 하면 통일운동이 발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 이상의 일은 나에게 없어요.” 이런 그에게 현재 통일운동의 퇴조는 마음의 큰 짐이다. “통일운동의 퇴조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요. 학생운동에선 4년이란 짧은 시기에 지도 역량이 커질 수 없고, 또 계승되지도 못해요. 동구의 몰락이나 남북의 관계 변화라는 사회 정세에 따라 정통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네요. 이런 때일수록 정통성 있는 통일운동이 계속되어야 할텐데……. 피치 못할 시대적 어려움이라고 봅니다. 지도자들이 계속 노력했으면 해요.” 끝으로 선생에게 꿈을 물어봤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낮지만 단호하게 얘기했다. “하루 빨리 통일이 이루어져서 분단의 아픔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아야지요. 낮은 단계의 통일이라도 이루어져서, 분단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힘겨워지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 세대에 이런 것들을 많이 해결했어야 했는데. 그럼 이런 취재가 필요없을텐데(웃음). 그래도 통일은 멀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꿈처럼 언젠가는 이런 인터뷰가 필요없는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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