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로 소개할 조봉암은 식민지 하 독립운동에서 시작해 해방 이후 암울한 정치 현실 속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모색했던 인물이다. 한국 현실과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조봉암의 신념은 한국 현대사 진보 세력의 논리 가운데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만약 조봉암과 진보당이 그 당시 정치권 내에서 성공적으로 세력화 되었더라면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당 정치가 일찍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현대사를 다룰 때 조봉암은 좌파정치인으로 짧게 언급될 뿐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조봉암을 재조명하고 그가 60여년의 생애 동안 걸어간 고민의 흔적을 되짚어 보도록 한다.해방 이후 전향, 그리고 새로운 정치 노선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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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 조봉암(1948년 제헌국회의원 시절) |
조봉암은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이후 공산주의 독립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해방 직후 한반도의 분할점령과 관련한 주변국들의 태도와 국내 세력들 간 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공산주의 운동을 그만둔다. 김학준 교수(인천대 정치학과)는 “죽산 조봉암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던 것은 ‘조선을 위한 사회주의’ 였고, ‘조선을 위한 공산주의’ 였다” 고 회고하며 조봉암이 조선과 관련한 코민테른의 활동방향에 많은 회의를 품고 있었다고 말한다. 해방 직후 시기 조봉암의 정치적 견해는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의 한 구절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조봉암은 박헌영에게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잘된 줄 아오마는 역시 통일전선으로서는 너무 우리 당원이 과대히 침투했기 때문에 비당원 군중의 능동적 활동을 스스로 제약시키고 있다고 보오…. ‘지방에서는 당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여야 된다’ 등의 지령은 과오로 생각되오”라고 충고했다. 이는 해방 후 정치 노선에서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당중앙과 조봉암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시사한다.대한민국 정부수립의 이후의 ‘정치인 조봉암’1948년 제헌국회에서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생활의 기본적 수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 토지개혁 등 주로 경제 조항의 정립과 통과에 힘썼다. 또한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자 했고, 국민의 기본권 제약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조항은 모두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의정 활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던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의 초대 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됐다. 장관 기용의 이면에는 ‘공산주의자’ 도 등용하는 등 인재를 폭넓게 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정권에 대한 비판을 불식시키려는 이승만 내각의 정치적 계산이 크게 작용했다. 그의 장관 재임은 오래 가지 않았고, 특히 그가 제안한 농촌 개혁 정책을 반대하는 지주들이 대거참여한 한민당이 1949년 1월초부터 그를 ‘공금유용’이라는 혐의로 압박했다. 결국 그는 1949년 2월 22일 취임 6개월만에 사임했다. 법원은 후에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대통령선거 출마와 진보당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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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4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대회(위원장 조봉암) |
발췌 개헌 이후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후보로 나섰다. 그는 “나는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대통령과 싸울 사람조차 없으면 국민이 너무 불쌍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 정열, 혁명 경력, 건국의 공로는 존경하지만 행정 책임자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나는 이 대통령에 대한 실망을 대변하기 위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로 했다” 라며 자신의 출마이유를 밝혔다. 선거 결과 조봉암은 전체 유효투표의 11.45%를 획득했다. 이후 그는 1955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진보적인 대중 정당 창당을 추진하는 한편 1956년 진보당추진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돼 제 3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다.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30%에 달하는 200여 만 표를 획득함으로써 이승만의 유력한 라이벌로 부상했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만이 정당성을 얻던 시절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 평화통일 이후에 공산당을 인정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은 당시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대통령 선거 이후 56년 11월, 진보당추진위원회는 창당대회를 열었고 그를 위원장으로 한 진보당이 공식 출범했다. 그러나 정적을 인정할 수 없던 이승만은 조봉암의 부상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시대의 비극, 진보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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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1933년 11월 17일자. 조봉암,김명시 등에 대한 재판기사와 재판정에 들어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좌측 상단). |
‘진보당사건’은 조봉암이 간첩죄로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한 사건을 말한다. 조봉암은 대통령 선거의 여세를 몰아 58년에 치뤄질 민의원 선거에 대비하고자 진보당 결성을 서둘렀고,도·시·군 당 조직에 나선다. 그러나 이승만은 차기 정권의 집권에 방해가 될 조봉암과 진보당을 그대로 둘 수 없었고 자유·민주·무소속의 범 보수세력이 진보당 말살에 합의하게 된다. 58년 1월 11일 조봉암, 이튿날 윤길중 진보당 간사장 등 진보당 간부들이 잇달아 경찰에 구속된다. 혐의는 진보당의 강령인 평화통일론이 국가보안법에 위배되며, 이중간첩 양명산과 접선해 북한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7월 2일 열린 1심에서 조봉암과 양명산은 징역 5년, 평화통일론·간첩 혐의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10월 25일 2심과 59년 2월 7일 대법원 판결에서 조봉암은 사형을 선고받고 재심신청 다음 날인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김 교수(인천대 정치학과)는 “조봉암은 세계 역사상 선두주자에게 공통적으로 가해지는 매를 맞은 사례”라며 조봉암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왜 ‘조봉암’ 인가? 이승만 정권의 반공체제가 구축되던 시점에서 조봉암은 ‘북진 통일론’에 정면으로 맞서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해방 후 정치적 혼란과 6·25전쟁으로 시작된 195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는 극에 다다랐고, 사회는 총체적인 무기력에 빠져 있는 와중에 조봉암을 필두로 혁신·진보세력이 태동했다. 간첩혐의로 사형된 이후 조봉암에 대한 평가는 ‘간첩’과 ‘선구적 평화 통일론자’사이에서 머물고 있다. 또, 그와 관련된 객관적 자료조차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역사 서술의 편향성을 드러낸다.40년 가까이 역사 속에 묻혀 있었던 조봉암의 삶은 어두웠던 한국 현대사와 맥을 같이했다. 그럼에도 조봉암에 대해 근현대사 교과서에 기술된 것은 고작 ‘진보당사건’의 사실관계를 서술한 한 페이지 뿐이다. 근현대 한국정치 혼란 속에 개혁을 하기 위해 죽음까지 내몰린 그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재인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