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삶이 좀 나아졌는데도 질문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돈다.양친부모를 둔 아이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굴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한다.현대화가 칸딘스키의 천재성을 찬양하는 어느 책에서는 어떤 색을 제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어린 칸딘스키가 “모든 색을 사랑하지요”라고 명민하게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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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좀 나아졌는데도 질문은 여전히 제자리를 맴돈다. 양친부모를 둔 아이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굴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한다. 현대화가 칸딘스키의 천재성을 찬양하는 어느 책에서는 어떤 색을 제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어린 칸딘스키가 “모든 색을 사랑하지요”라고 명민하게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태생적으로 민주주의자였다는 건데, 그렇다고 어른의 상투적 질문 자체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어린 칸딘스키의 비범함은 왠지 위악스러워 보인다. 그러니까 ‘이 한 권의 책’이라는 꼭지의 이름이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푸념으로 시작했지만 나는 작년에 이미 나의 ‘이 한권의 책’을 결정해 둔 터였다. 작년 수업을 종강하고 어느 학생에게서 받은 질문. “당신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나는 하루를 고심하다가 고등학교 때 읽은 레마르크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책으로 대답했다. 정언명령조의 제목부터 요즘 식으로 말해서 ‘구린(내가 나는)’ 소설. 이번에 책 소개를 해달라는 『서울대저널』의 부탁을 받고,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보았다. 오래 전 읽은 ‘좋은’ 책을 선택하는 것은 현재의 나를 설명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지나간 과거 중 현재의 나(의 욕망)와 인과론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을 선별함으로써 나는 이미 과거에서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것이라고 정당화하려는 것일 게다. 현미경을 더 갖다대보면 과거의 기억을 선별하는 일은 현재의 나를 선별하는 작업이라는 게 밝혀진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 읽었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거론함으로써 지금 내가 농담과 허풍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필립 K 딕의 어린이용 SF 소설을 거론하며 내가 시뮬레이션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탐독했던 할리 퀸 로맨스를 들먹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욕망의 현실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나는 결국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책을 편집진의 질문 – 이 10 권의 책도 아니고 이 1권의 책이라니! – 의 “폭력성” 운운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 글을 누가 읽을까? 서울대를 다니는 학생들과 서울대를 경원시하는 그 외 여러분들? 나는 이제 40대이고 내 이야기가 학생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만큼이나 지루하고 갑갑하게 들리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이야기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며, 20대의 삶의 현재성을 이해한다는 얘긴 게다.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이십년도 더 전에 읽은 그 책에 대해 나는 “국적 없이 국경을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어”라고 말할 것이다. 덧붙여 고등학생 시절 나는 “나 역시 그렇게 살 것이다, 혹은 나는 그렇게 살게 되어 있어”라는 이상한 확신을 느꼈다고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 전 학교도서관에서 다시금 찾아낸 이 긴 소설에는 이미 누군가 – 한 사람의 흔적이다 – 가 읽고 줄 친 문장들이 여럿 눈에 띤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쓸모없는 단어 – 자유라는 말’, 혹은 ‘국경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혹은 ‘그들이 나를 파멸시키지 못한다는 것’, 혹은 ‘그것은 인간 존재의 모든 둑을 새어나오게 하는 피조물 자체의 곤궁이었다’와 같은. 나는 살아서 이미 화석처럼 굳혀진 존재들, 청춘들에게 올바름에 대한 욕망이 때론 더러움에 대한 욕망일 수 있음의 표본이 돼 버린 ‘386’의 일원이다. 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같은 ‘진지한’ 소설을 읽고 대학에 들어왔고, ‘해방’의 담론으로 청춘을 소진했으며, 이젠 푸코와 데리다 등을 운운하며 ‘해방’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는 이성이나 정신이 아니라 오감을 만족시키는 삶의 우선성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서울대생’이 부럽기도 하다. 올바른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띠껍다’라고 단언하는 청춘이 부럽다. 그러나 부러워도 흉내조차 안 내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최근 도서관 대자보에 붙은 ‘심플 라이프’ 선언의 문장들을 읽으며 마음이 떨리는 그런 족속이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희망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살겠다’라는 맹세 앞에서는 일순간 전율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욕망이 어떤 폭력을 내재한 것일지 의심하기 전에.무국적자로 국경과 감옥을 오고가며 들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파시즘과 아우슈비츠를 피해 무국적자로 국경을 떠도는 유대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도 진행 중인 삶이다. 국내로 불법으로 밀항하던 조선족들(재중동포들!)이 공기도 안 통하는 컨테이너 안에서 질식사했다는 이야기들은 레마르크의 소설 속 피아노를 치는 대학생이나 도박으로 노잣돈을 마련하는 주인공들을 차라리 사치스러운 사람들로 만든다. 이주 노동자들, 탈북자들의 삶은 대체 어떻게 기록되어야 할까?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거론함으로써 경계인의 삶에 대한 내 선망이나 욕망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연 경계인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은유로서의 삶과 실제 삶 사이에 존재하는 나의 기만은 얼마나 큰 것일까? 용서받을 만큼은 되는 걸까? 그러나 은유로서의 삶이 사라지고 현실만 남는다면, 나는 윤리적 삶을 ‘강요당했던’ 시대를 지나왔기에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욕망, 쾌락, 냉소 그리고 가벼움은 나, 혹은 ‘우리’에게는 허여되지 못한 것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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